본문 바로가기

[발.자.국.] 여행/체험

짙푸른 강산의 눈부신 속삭임, 단양 4

 

오순도순 저희들끼리 세월을 나누는 삼선구곡을 뒤로하고,

이제는 기암절벽의 진수를 맛보러 가는 길.

 

소백산의 눈부신 물줄기가 비취빛 절벽강산과 만나 진경을 이루는 사인암이다.
산 하나를 그대로 조각한 듯한 사인암을 베개 삼고,

단양의 눈부신 하늘을 이불 삼아, 옛날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단양팔경 중 제5경이며 높이가 70미터에 이르는 사인암은, 수직에 가까운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다.
바로 아래에는 소백산맥에서 발원한 남조천(일명 운계천)이 흘러내리고,

붉은 암벽 꼭대기에는 모진 풍파를 겪어낸 노송들이 생명의 신비로움을 제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인암을 가리켜 추사 김정희는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하고,

그 빼어난 경관에 압도된 단원 김홍도는 무려 1년여를 사인암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한다.

 

김홍도의 <사인암도>. 호암미술관 소장.

 

옛날 옛날 고려시대 대학자였던 역동 우탁(禹倬)이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 재직 시 이곳에 머무르며 풍류를 즐겼다 하여,
'사인암'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곳에는 유독 우탁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로 청련암의 삼성각이 보인다.

 

삼성각으로 오르는 좁고 가파른 계단 입구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우탁의 유명한 詩 '탄로가'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사인암 청련암의 주지였던 학산 스님이 단기 4328년(1995년)에 각자(刻字)한 것이라 한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캬캬~! 우탁의 풍자와 해학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스란히 마음에 와 닿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는구나!
이외에도 사인암 바위에는 여러 가지 글귀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운계천을 벗삼아 장기와 바둑을 두며 풍류를 즐기던 조상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수많은 이름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바위 옆으로 '일주경천 백천회란(一柱擎天 百川廻瀾)'이란 글귀가 보인다.

'치솟은 절벽은 하늘을 잡으려는 듯 우뚝 솟았고, 수많은 물줄기가 굽이쳐 흐른다'는 뜻으로, 사인암의 전경을 묘사한 글이다.

 

 

 

오랫동안 풍류객의 손때를 고스란히 간직한 저 천연의 장기판과 바둑판 앞에 척 자리잡고 앉아,

도낏자루 썩을 때까지 신선놀음 한번 해볼까나. ^^

 

어제라는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바위 위로, 오늘이라는 파릇파릇한 새 생명이 자라난다. 역사는 어디에나 살아 있다.

 

사인암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나오는 길이었다.
뜬금없이 어릴 때 큰 소리로 외우곤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첫 부분이 생각났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맞다. 수양개 선사유적지를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얼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
단양의 금수강산에 내 발자국도 보탰으니, 아~ 왠지 코끝이 찡하다.

 

또 다른 무릉도원이 나를 부르나니, 어쩜 이리 타이밍도 잘 맞을꼬! 충주호의 물안개를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비가 온다!

 

천연의 비경을 간직한 덕에 예로부터 제2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단양이 충중호의 푸른 물결과 만나,

비로소 그 절경에 마침표를 찍는다.


신선의 눈물 같은 빗방울은 방울방울 맺혀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가슴까지 안개가 자욱해진다.

그러나 이윽고 가슴속 안개를 헤치며 들려오는 하늘과 강과 산의 환상적인 삼중주에,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인다.

어떤 상처도 포근히 안아 줄 것 같은 물안개에 마음을 기대며, 기꺼이 신선의 뱃놀이에 동참한다.


장회나루. 단양팔경 중 하나인 구담봉과 옥순봉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그 옛날 이 강을 건너다녔을 나룻배는 유람선으로 대체됐다.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에 오르는 순간, 마침내 장대한 공연의 서막이 열린다.
절찬리에 상연되고 있는 충주호 순회공연이다.
주연은 구담봉, 옥순봉, 강선대 등등이고 연출은 충추호, 눈앞 가득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무대효과를 맡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후 충주호와 단양이 빚어낸 황홀한 신천지를, 아껴가며 가슴에 담는다.
오호라, 순풍에 돛을 달고 뱃놀이를 즐기던 선조들의 풍류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신선이 따로 있나, 이렇게 사는 것이 신선이지!

 

 

 

하지만 감탄도 잠시.
신선이 사는 곳과 겨루어도 손색없을 것 같은 바로 이곳이, 충주호 수몰지구 중 하나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숙연해질 수밖에.
세상에,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한 이 물 밑으로 마을이 있었다니...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인해 그 마을이 물에 잠기는 순간, 수많은 이들이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리고 있는 빗물은 신선의 눈물이 아닌 실향민의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충주호라는 값진 유산을 우리가 선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부디 그들 모두가, 어느 곳에서든 행복하기를 마음을 다해 빈다. 꿈에도 잊히질 않을 그들의 고향 산천을 대신하여.

 

 

조금씩 거세지는 빗방울 사이로 안개에 싸인 신비로운 풍경이 이어진다.
그중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소설 같은 로맨스를 품고 있는 강선대이다.
어느 시대에나 이루지 못할 사랑이 있었으니, 이승에서 못다 맺은 緣을 저승에서라도 맺게 되기를.

 

강선대(降仙臺). 이곳은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임 중에 두향이라는 기생과 정을 나눈 곳으로 유명하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떠나가자 두향은 강선대 아래에 초막을 짓고 평생 그를 그리워하다가 이곳에 묻혔다 한다.

(자세히 보면 가운데 부분에 두향의 무덤이 보이는데,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강선대 위쪽으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충주호의 잔잔한 물길을 따라가노라면 퇴계 이황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단양군수를 지낸 이답게 이곳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애틋했던 듯싶다.

 

  구담을 지나는 새벽달은 산에 걸려 있어  그 곳을 상상하니 뵐동말동 아득하이  

  주인은 이제 와서 다른 곳에 숨었으니  학과 잔나비 울고 구름만 한가하네

  매어달린 듯 깎아지른 절벽은 하늘에 오르려하고  새로 갈은 장검은 경중에 꽂혔더라 

  누가 달 여울에 가로 앉아 시선을 부를 것이며  늦게 취하여 신공의 묘함을 알 수 있으랴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노래한 구담봉과 옥순봉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팍팍한 우리네 삶에 맑은 위로가 된다.

 

단양팔경 중 제3경인 구담봉.

거북이 한 마리가 절벽을 기어오르는 듯한 형상인 데다가, 물속에 잠긴 바위에 거북 무늬가 새겨져 있어 구담(龜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가장 많은 이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고 있는 봉우리로, 마치 열두 폭 병풍을 충주호의 물결 위에 쭉 펼쳐놓은 듯하다.

 

단양팔경 중 제4경인 옥순봉. 크고 작은 바위들이 대나무 순 모양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이런! 중요한 순간에 또 배터리가! 할 수 없이 두산백과사전에서 퍼왔다. ㅠㅠ)

 

 

 

꿈결 같은 풍경을 스쳐 지나며, 천천히 선회하는 배의 꽁무니에 서서 지나온 뱃길을 돌아본다.
소백산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했던 여행을, 이제 태극기가 휘날리는 충주호의 물길 위에서 마감한다.
조상의 발자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단양에서의 이틀은 참 행복했다.

 

바위 하나, 봉우리 하나, 물길 하나에도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丹陽은,

'신선이 다스리는 빛 좋은 고을'이란 이름이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지만, 그 어떤 외침보다도 가슴 깊이 파고들던 단양의 그윽한 울림을 두고두고 기억하리라.

 

태극기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모쪼록 단양의 짙푸른 정기를 이어받아 조금쯤은 푸르러지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단양의 강산이, 아쉬워하는 나를 배웅하며 다정하게 속삭인다.
'언제
든 다시 와! 떠난다는 건 돌아온다는 약속이기도 하니까.'

-끝-

 

 

 

 


큰지도보기

단양사인암 / 바위

주소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 27번지
전화
043-422-1146
설명
기암과 계곡과의 만남이 장관을 이루는 사인암\n대강면 사인암리에 위...

 


큰지도보기

충주호 / 호수

주소
충북 충주시 동량면 화암리 산 11-1번지
전화
043-851-5771
설명
충주댐 건설로 계곡의 물을 막아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

 


큰지도보기

구담봉 / 산봉우리

주소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산 32번지
전화
043-422-1146
설명
단양8경 중 하나로,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절벽 위의 바위가 흡...

 


큰지도보기

단양옥순봉 / 산봉우리

주소
충북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
전화
043-641-5143
설명
제천 10경과 단양 8경에 속하는 절경, 옥순봉\n월악산국립공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