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출판일기] 책 이야기

출판일기를 시작하며(下)

 

 

 

  우선은 집에서 가까운 파주 출판단지와 일산에 위치한 출판사들부터 공략했다.

  처음에 세 통, 그다음엔 두 통, 그 다다음에 또 세 통……. 사실 이력서를 쓰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도대체 얼마 만에 쓰는 이력서더냐. A4 용지를 꽉 채우라는 자기 소개서는 또 어떻고. '훅!' 하고 이력서 위로 지난 세월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 놀면서 살아오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영부영 시간을 다 써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증명이나 하듯 이력서를 보낸 열 군데가 넘는 출판사 중 단 한 군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연락은커녕 이력서조차 읽어보지 않은 듯했다.  

  모집조건에 나이 제한이 없다고 씌어 있는 출판사들만 기껏 눈 아프게 고르고 골라 보냈는데, 어찌 이럴 수가!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이력서 보내고 기다리고, 다시 보내고 다시 기다리고. 당연히 화가 났다. 당연히 암담했다. 당연히 비참했다.  

  젠장, 출판사 아니면 일할 데가 없냐. 야, 더럽고 치사하다. 월급도 쥐꼬리만큼 주는 주제에.

  다음 수순을 밟았다. 취업 웹사이트를 다시 돌아다녔다. 헉, 할 만한 일이 없었다. 대부분 나이에 걸리거나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일자리였다.

  당근 또 기가 죽었다. 여태 뭐하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으로 한 달이란 시간을 다시 흘려 보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사십 넘은 여자가 그것도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여자가 이력서를 내려면, 눈높이를 팍팍 낮추고 현실에 맞춰가는 수밖에.

  "책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했어요."  세상에, 이건 경력 축에도 못 끼었다. 

 

  몇 군데로 압축되었다. 기술이나 경력이 없어도 되는 LCD 공장에서 단순 조립하는 일과 자유로 휴게소의 스낵 코너 일이었다. 

  둘 다 야간 근무였지만 그래서 보수가 좋았다. 나야 뭐 밤낮을 거꾸로 사는 사람이었으니 야간 근무가 그리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그 중 집에서 15분 거리인 자유로 휴게소에 가족들 몰래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고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대필 작가를 뽑는다는 출판사에도 마지막으로 이력서를 넣었다.

  근 7, 8개월 넘게 이력서와 사투를 벌여서일까. 아니면 하늘에서 지켜보던 아빠가 하도 기가 막혀 힘을 써주었기 때문일까.

  바로 다음날 두 군데서 동시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휴게소에서는 내 경력을 보더니 소장님이 혀를 차셨다. 이런 일을 해보지 않았는데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뭐라고 대답했겠는가, 할 수 있겠다고 했지. 일단 하게 되면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겠다고. 그랬더니 바로 출근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한 군데 면접을 더 보기로 했는데, 죄송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없느냐고. 다행히 소장님이 그러겠다고 하셨다.

  출판사에서는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를 뽑는다고 했다. 그래서 또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또박또박 나오는 월급이 필요하다고.

  다른 출판사에도 이력서를 넣었었는데 연락조차 오지 않아서 휴게소에 면접을 보고 왔고, 거의 오케이가 되었다고.

  그러니까 정기적인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휴게소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내가 알고 있던 출판사 대표들과는 달리 인상이 무척 푸근했던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셨다.

  휴게소에 대답하기로 한 날짜 전까지 내게 맞는 일거리가 생기면 연락을 주시겠다면서.

 

  사실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마음이 지쳐서 이리저리 머리 굴려야 하는 출판사 일보다는 몸을 움직여 일하는 휴게소 일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평소에도 노동을 해서 번 돈이야말로 값지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완전 저질 체력의 소유자였기에 자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 애기가 너무 길어졌다. 날이 갈수록 왜 이리 핵심만 짚어 말하지 못하나 모르겠다. ㅠㅠ

  이틀 후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고, 마침내 길고 길었던 일자리 찾아 삼만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내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와의 귀한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 p.s. 위의 사진은 작년 9월부터 올 4월까지 내 손을 거쳐간 책들이다.

           다음부터는 이 책들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