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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일기] 책 이야기

이 많고 많은 책 중에

 

  나는 한낮에 집 근처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한다.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 앉아 조용히 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서가를 눈으로 훑으며 원하는 책을 찾아 그것을 빼어드는 순간 역시 참 좋다.

  이 많은 책 중에, 어떤 식으로든 내가 참여했던 책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더 반갑고 더 기분이 좋다.

  

  그전까지 내가 일하던 출판사들은 주로 순수문학 책을 발간하는 곳이었다.

  소설이나 수필, 시 등이 대부분이었으므로 편집자 입장에서는 그다지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원고들이었다.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기존 작가들이 쓴 원고들이라 나름대로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 표지와 본문 레이아웃을 빼고는(그건 편집 디자이너들의 몫이다), 중간 편집자인 나로서는 오케이 교정과 간단한 윤문, 서평, 보도자료 등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간혹 저작권과 상관 없는 옛 작가들의 산문집이나 소설집, 시집 등을 재편집하여 출간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국립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마이크로필름을 뒤져 정확한 자료를 찾아내고, 그 구성에 맞춰 재배열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옛 작가들의 원고를 볼 때는 오케이 교정이 무척 중요하다. 기존에 출간되어 있는 책들과 차별성을 주기 위해서라도, 한글은 물론이요 한문 한 자 한 자부터 외래어까지 정확하게 잡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할 때는 머리보다는 눈이 아픈 편이다. 

  때때로 원고 기획부터 참여하거나 저명인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자서전이나 수필 등의 대필 일을 하기도 했는데, 이럴 때는 저자와 출판사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중간에서 잘 절충하여 일을 진행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쪽 입장을 다 살필 수 있는 빠른 눈치가 제일로 중요하다. ㅎㅎ

 

  이번에 새롭게 일하게 된 출판사는 인문학에서부터 실용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출판사였다.

  특히 자비출판까지 하고 있어서, 교정이나 간단한 윤문 정도로 끝날 원고들이 아니었다.

  초고부터 뜯어 고치고, 구성을 새로 짜고, 분량을 맞추기 위해 원고 첨삭을 하는 등 대체로 손이 많이 가는 원고들이다.

  아예 창작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집으로 따지면 부분 보수가 아닌 전체 리모델링 작업인 셈이다.

 

  일은 많고 힘들어졌지만 그만큼 좋은 점도 있다.

  전과는 다르게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의 원고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유명한 몇몇 작가의 책만 팔리고 있는 출판 시장에서는 이런 기회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자본금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자신들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로 특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년 남짓 된 신생 출판사에서 여러 분야의 책을 한 달에도 몇 권씩 계속해서 출간해 낸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자본력과 무엇보다 출판사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의 굳건한 신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출판사 대표님을 처음 만난 날, 어떻게 이 험난한 출판시장에 뛰어들게 되셨냐고 물었다.

  그 대답이 재미있었다. 자신의 책을 출간하고 싶어 여러 출판사를 돌아다녔는데, 워낙 문턱들이 높아 거절을 당했다는 것이다.

  몇 번 거절을 당하고 나니 이럴 바엔 차라리 자신이 직접 출판사를 차려, 책을 내고 싶어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출판사를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사실 등단을 통해 소설가나 시인 등의 작가 타이틀을 달 수 있는 제도는 우리나라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글쓰는 이들은 신춘문예나 문예 계간지 등을 통한 등단용 글쓰기에만 몰두해 있고, 출판사들 역시 작가라는 타이틀을 단 원고들을 첫 번째로 선호하고, 독자들 역시 저자의 경력이나 이력부터 살피는 것이 당연한 일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그 재능을 알아봐 주는 편집자가 있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 주는 출판사가 있어야 하는데, 이상과 현실이 늘 평행선을 달리니 날이 갈수록 독서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이것은 당장 통계로도 증명되고 있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한 달 평균 독서량이 채 1권에도 못 미치는 0.8권이라는 사실. 그것도 그나마 자기계발서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여기서 한 가지 희한한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흔치 않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어깨를 으쓱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우리나라이다.  그렇게 책을 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책들은 읽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해서 새로운 출판사에 둥지를 틀었고, 이번 명함에는 출판편집 프리랜서 대신 Writer라는 직함이 붙었다. 물론 앞에 대필이란 단어가 빠졌지만 말이다. ^^

  그리고 오늘도 나는 여지없이 마감에 쫓기며 날밤을 새우고 있다. 이 많고 많은 책 중에 내 손길이 닿는 책들이 조금이라도 많아지기를 바라 마지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