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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여행/체험

낯선 거리에서

 

  토요일 한낮이었다.

  마른장마의 따가운 햇볕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드는.

  참으로 오랜만에 낯선 곳을 버스를 타고 찾아가는 길이었다.

  동네 정거장마다 다 서는 버스에 앉아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따뜻한 하루>라는 책을 펼쳐들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요즘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푹 빠져버린 임태경의 'Adagio'를 듣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버스 차창을 타고 도둑고양이처럼 넘어오는 햇살 한 자락과 만나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느닷없이 찾아든 평온함이었다.

  ‘흠, 이것도 흥미롭네.’

  몸도 마음도 편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토요일 한낮에 낯선 곳으로 낯선 이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낯섦에 경기를 일으키는 나로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웬일인지 정차하는 정류장마다 평온한 풍경이었다.

  문득 차창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유월의 땡볕이 그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지글거리는 땡볕 속에 서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버스에 앉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평온을 느낄 자격이 충분하였다.

 

  두 번째 버스로 갈아타려고 역시 낯선 동네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 낯선 이들에게 길을 물었다.

  “혹시 ○○○이라고 아세요? 여기서 타는 게 맞나요?”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 두 분께 묻는 순간, 내 목소리가 너무 어린아이 같아 겸연쩍고 부끄러워졌다.

  나를 힐끔 쳐다보던 할머니 두 분이 동시에 대답하셨다.

  “건너편에서 타야 해. 저쪽 신호등에서 건너서 타.”

  꾸벅 인사를 하고 길을 건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 방향이 아닌 것 같았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가르쳐 주신 대로 탈 수밖에.

  이번에는 내가 땡볕에 서 있는 처지가 되었다. 평온함이 슬슬 짜증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두 번째 버스가 곧바로 왔다. 처음 버스보다 더 한적한 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다시 책을 펼쳐들고 임태경을 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한 정거장을 지나쳐서야 내리게 되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약속장소까지 터벅터벅 낯섦을 즐기며 걸어갔다. 경기도였는데도 외딴 시골마을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약속장소는 2차선 도로 앞 상가였다. 건너편이 너무 가까웠다. 나중에 집에 갈 버스편을 확인하느라 무단횡단을 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고 2차선 도로 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 사이로 전선줄들이 매달려 있었다. 내 마음에도 전선줄이 내걸렸다.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전선줄을 볼 때마다 부러워지곤 했다. 

  

  토요일 오후.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거리. 쏟아지는 햇볕. 그 사이를 건너뛰어 불어오는 바람.

  시간이 얼마쯤 흐른 후 나는 이 낯선 거리의 풍경들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때도 지금처럼 생경한 평온함으로 다가올까.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은행 앞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약속한 사람을 기다렸다.

  다시 책을 펼쳐들고 사진을 보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메모해 나갔다.

 

  “친구는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했다.

   산 위에 올라서면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산을 올라가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 풍경을 보는 순간 모든 고통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올바르게 사는 것 역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 신비를 생각해야 한다.

   억울한 일을 겪지 않고는 다른 세상을 볼 수 없으니.”

 

  간간히 임태경의 목소리에 가슴을 적시며 메모한 글의 마지막 구절을 중얼거렸다.

  억울한 일을 겪지 않고는 다른 세상을 볼 수 없으니...

  아주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온 이방인처럼 낯선 거리 위에서 일시 정지된 풍경. 

  다른 세상이었다.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딱 낯선 그만큼만 평온한 시간이었다.

  눈에 익으면 지금의 평온이 고스란히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나는 약속한 사람이 오기 전까지 한 번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