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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여행/체험

짙푸른 강산의 눈부신 속삭임, 단양 1

 <어느 여름날의 단양팔경 유람기>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오래 전 텔레비전 광고 속의 한 구절이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만끽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번만큼은 그 모습을 흉내내도 찔릴 게 없겠구나 생각하며,

창밖으로 비죽 손가락만 내밀고 이리저리 흔들어 본다.

누가 보든 말든 혼자서 히죽거리며.

 

그러나 자유를 채 맛보기도 전에 차는 막히기 시작하고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잠시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지각이다.

버스 전용 차선만 믿고 전철을 타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거의 한 시간 가량을 좌불안석으로 버스에 갇혀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쯤 왔냐는 전화는 빗발치고... 죄송죄송! (__)

 

 

출근 시간이라 고속도로를 타는 길도 조금씩 막힌다. 정체가 풀리기 시작할 즈음 앞차에 눈길이 갔다.
<청춘버스>! 캬~ 얼른 저 차로 갈아타야겠다. ^^

 

 

 

달리는 차 안에서 창 너머의 풍경을 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차는 앞으로 달려가고 풍경은 뒤로 달아난다.

시간과 속도와 무관하게 뒤로 달아나는 풍경을 열심히 가슴에 붙잡아 놓는다, 찰칵찰칵! 

 

 
 
헉헉 숨을 몰아쉬며 출발지에 도착해 백배사죄부터 하고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몸 상태로 봐서는 여행보다는 휴식이 더 필요했던 때라, 다소 무리하게 떠난 길이었다.
목적지가 단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은 그동안 못 잔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을 터.
그만큼 단양은 내게 특별한 곳이었다.

할아버지 댁이 있던 풍기에 갈 적마다 지나치던 곳인 데다가,

생전의 아빠와 함께했던 여행길의 추억이 소복이 담겨 있는 곳이기 때문.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단양 시내를 거쳐 죽령고개를 넘어다니곤 했는데,

그 좁고 험한 고갯길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빠가 오빠에게 늘 천천히 안전거리 유지하며 달리라고 했던 길이다.

이제는 죽령터널이 뚫려 그 길로 갈 기회가 좀처럼 없다.

 

세월 따라 길도 바뀌었다. 세월 따라 내가 바뀌었듯이.

가끔씩 그 옛길들이 보고 싶어진다. 내 사무치게 그리운 아빠와 함께.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길에서 마주쳤던 치악산과 소백산 자락의 짙고 푸르름도 잊을 수 없다.
'산이 깊다'는 말의 의미를 이 두 산을 통해 처음으로 깨닫게 됐으니.
푸르러서 깊고 깊어서 짙고 짙어서 가슴 벅찬 산빛이라니.
그 산빛으로 마음까지 깊어지고, 이 땅에 살 수 있어 참 좋다! 라는 생각이 든다.

 

저 앞에 보이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산이 바로 치악산이다. 반갑다, 산아!

 

 

치악산을 통해 단양으로 가는 길에는 유독 터널이 많다. 터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신나는 일이다.

 
 

 

어둠과 빛이 터널만큼 대조를 이루는 곳이 또 있을까.
어둠 속을 지나는 동안에도 터널 끝에 마중나와 있을 빛을 생각하면, 이깟 어둠쯤이야! 하는 배짱이 생긴다.
인생도 마찬가지. 어떤 길에서든 포기 대신 용기를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길 끝에서 빛과 같은 희망과 만나리니.
 

 

굽이굽이 산의 푸르름과 추억에 흠뻑 취해 있는 사이, 저 멀리로 점잖게 손을 흔들고 있는 단양이 보인다.
아, 평온이란 이런 것이구나! 단양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조용하고 평안한 느낌.
게다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신선의 놀이터와 진배없을 만큼 훌륭했다.
깊고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사이를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강 한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바로 단양팔경 중 제1경인 도담삼봉이다.

 

 

 

도담삼봉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원래는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봉우리의 모양새를 두고 중심을 남편봉, 왼쪽을 처봉, 오른쪽을 첩봉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그 전설이 익살맞기도 하다.


남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들인 첩이 임신을 하자, 시샘이 난 부인이 등을 대고 돌아앉은 모습이라는 것.

 

 

 

삼도정이라 불리는 육각정자가 남편봉의 운치를 더해 준다. 바람을 맞으며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면 신선도 부럽지 않을 듯.

 

아이를 밴 형상인 일명 첩봉. 공교롭게 새 두 마리도 등을 대고 서로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혹시 얘들도? ㅎㅎ

 

 

 

 

자신의 호를 도담삼봉의 '삼봉'을 따서 지을 만큼 이곳에 애정을 가졌던 정도전을 비롯해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등도 도담삼봉의 풍취에 반해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중 이황의 시 한 수를 옮겨 본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별빛 달빛 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좋~다! 옳거니, 내 꼭 꽃단풍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예 다시 와, 도담삼봉의 별빛 달빛 금빛을 훔치고야 말 테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도담삼봉의 아늑한 정경. 산과 강이 어우러진다는 건 바로 이런 것.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깊고 푸른 강산에 취해 전망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가파른 계단이 버티고 서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다리 같기도 하고 무지개 같기도 한 돌기둥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석문이다.

오랜 옛날 석회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자연이 빚어낸 놀라운 솜씨에 그저 혀를 내두를 뿐.

 

석문 자체도 신기하지만 가운데 문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 또한 장관이다.

석문은 내가 늘 관심을 기울이는 창과 틈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어디에 앵글을 맞추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구멍이나 틈새도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석문을 마주하고 서서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산과 나무와 하늘과 돌과 강과 마을이, 때로는 각각 때로는 함께 그 자태를 뽐내는 곳.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단양팔경 중 제2경인 석문. 신비롭게 뚫려 있는 구멍 안으로 보이는, 남한강과 마을의 풍경이 평온 그 자체다. 

 

석문은 그 자체가 담쟁이덩굴의 보고다. 세월과 끈질긴 생명력이 합해져 늘 푸른빛을 발하고 있다.

 
 

 

단양의 짙푸른 산과 강에 눈과 마음도 말갛게 씻겼으니 이제는 시내 관광에 나설 차례.
육쪽마늘로 유명한 단양의 전통시장을 거쳐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연신 두리번거리며 터벅터벅 걷는다.
이상하게도 낯선 도시의 동네 길에 들어서면 마음이 들뜬다.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낯섦조차도 포근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끈끈한 유대감 덕분일까? 精이라는 것 말이다.

 

 

 

 

단양 시내 풍경. 마을 더 안쪽의 골목길을 찍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한적하면서도 깨끗했다.

 

 

 

 

단양 시외버스터미널. 내부로 들어가니 조그만 매표소와 송종국 기념관이 있다. 아마도 이곳 출신인 듯하다. 새삼스럽게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이 되살아나 잠시 구경을 했다. 매표소도 기념관도 너무 소박해서 놀랐다.

 

 

터미널 안쪽을 돌아 나가니, 와~ 한 폭의 수묵화 같은 강과 산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 위에 참말로 그림같이 떠 있는 다리 이름은 고수대교. 야호, 조금만 있으면 저 예쁜 다리를 직접 건너 온달관광지로 향한다.

 

 

 

 

단양의 길은 아기자기한 것이 참 예쁘다. 강과 산을 각각 한쪽씩 끼고 크고 작은 다리를 건너다니는 것 또한 단양 여행의 포인트.

 

 

앞자리에 앉은 덕택에 쭉 뻗은 길들을 맘껏 찍을 수 있었다.
강을 건너고 산을 지나 싱그러운 초록빛 길로 접어드니, 문득 이메 님의 따뜻한 시 <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왜 있잖아요, 살다보면/ 딱 한 번 가고 온 것뿐인데/ (중략) / 눈감아도 선한 / 조금은 미안한

 

 

지금 지나고 있는 단양의 길들도 내 가슴에 찍혀, 눈을 감아도 선하게 떠오를 길이 돼 주겠지. 그때쯤 나는 이 길들에게 미안할까 미안하지 않을까...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판가름 날 테지만... 길에 대한 단상에 빠져 있는 사이 차는 내내 남한강을 끼고 달린다. 온달관광지가 있는 영춘면으로 가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혼자여도 좋고 여럿이어도 좋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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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도담삼봉 / 산봉우리

주소
충북 단양군 매포읍 하괴리 195번지
전화
043-422-1146
설명
남한강의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 한가운데 위치한 도담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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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 / 바위

주소
충북 단양군 매포읍 하괴리 산 20-35번지
전화
043-422-1146
설명
단양8경 중 하나로 무지개 모양의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