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단양팔경 유람기>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오래 전 텔레비전 광고 속의 한 구절이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만끽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번만큼은 그 모습을 흉내내도 찔릴 게 없겠구나 생각하며,
창밖으로 비죽 손가락만 내밀고 이리저리 흔들어 본다.
누가 보든 말든 혼자서 히죽거리며.
그러나 자유를 채 맛보기도 전에 차는 막히기 시작하고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잠시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지각이다.
버스 전용 차선만 믿고 전철을 타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거의 한 시간 가량을 좌불안석으로 버스에 갇혀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쯤 왔냐는 전화는 빗발치고... 죄송죄송! (__)
달리는 차 안에서 창 너머의 풍경을 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차는 앞으로 달려가고 풍경은 뒤로 달아난다.
사실 몸 상태로 봐서는 여행보다는 휴식이 더 필요했던 때라, 다소 무리하게 떠난 길이었다.
목적지가 단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은 그동안 못 잔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을 터.
할아버지 댁이 있던 풍기에 갈 적마다 지나치던 곳인 데다가,
생전의 아빠와 함께했던 여행길의 추억이 소복이 담겨 있는 곳이기 때문.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단양 시내를 거쳐 죽령고개를 넘어다니곤 했는데,
그 좁고 험한 고갯길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빠가 오빠에게 늘 천천히 안전거리 유지하며 달리라고 했던 길이다.
이제는 죽령터널이 뚫려 그 길로 갈 기회가 좀처럼 없다.
세월 따라 길도 바뀌었다. 세월 따라 내가 바뀌었듯이.
저 앞에 보이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산이 바로 치악산이다. 반갑다, 산아!
치악산을 통해 단양으로 가는 길에는 유독 터널이 많다. 터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신나는 일이다.
어둠과 빛이 터널만큼 대조를 이루는 곳이 또 있을까.
굽이굽이 산의 푸르름과 추억에 흠뻑 취해 있는 사이, 저 멀리로 점잖게 손을 흔들고 있는 단양이 보인다.
도담삼봉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봉우리의 모양새를 두고 중심을 남편봉, 왼쪽을 처봉, 오른쪽을 첩봉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그 전설이 익살맞기도 하다.
남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들인 첩이 임신을 하자, 시샘이 난 부인이 등을 대고 돌아앉은 모습이라는 것.
삼도정이라 불리는 육각정자가 남편봉의 운치를 더해 준다. 바람을 맞으며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면 신선도 부럽지 않을 듯.
아이를 밴 형상인 일명 첩봉. 공교롭게 새 두 마리도 등을 대고 서로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혹시 얘들도? ㅎㅎ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등도 도담삼봉의 풍취에 반해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중 이황의 시 한 수를 옮겨 본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도담삼봉의 아늑한 정경. 산과 강이 어우러진다는 건 바로 이런 것.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깊고 푸른 강산에 취해 전망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가파른 계단이 버티고 서 있다.
구름다리 같기도 하고 무지개 같기도 한 돌기둥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석문이다.
자연이 빚어낸 놀라운 솜씨에 그저 혀를 내두를 뿐.
석문 자체도 신기하지만 가운데 문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 또한 장관이다.
어디에 앵글을 맞추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단양팔경 중 제2경인 석문. 신비롭게 뚫려 있는 구멍 안으로 보이는, 남한강과 마을의 풍경이 평온 그 자체다.
석문은 그 자체가 담쟁이덩굴의 보고다. 세월과 끈질긴 생명력이 합해져 늘 푸른빛을 발하고 있다.
단양의 짙푸른 산과 강에 눈과 마음도 말갛게 씻겼으니 이제는 시내 관광에 나설 차례.
단양 시내 풍경. 마을 더 안쪽의 골목길을 찍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한적하면서도 깨끗했다.
단양 시외버스터미널. 내부로 들어가니 조그만 매표소와 송종국 기념관이 있다. 아마도 이곳 출신인 듯하다. 새삼스럽게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이 되살아나 잠시 구경을 했다. 매표소도 기념관도 너무 소박해서 놀랐다.
터미널 안쪽을 돌아 나가니, 와~ 한 폭의 수묵화 같은 강과 산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 위에 참말로 그림같이 떠 있는 다리 이름은 고수대교. 야호, 조금만 있으면 저 예쁜 다리를 직접 건너 온달관광지로 향한다.
단양의 길은 아기자기한 것이 참 예쁘다. 강과 산을 각각 한쪽씩 끼고 크고 작은 다리를 건너다니는 것 또한 단양 여행의 포인트.
앞자리에 앉은 덕택에 쭉 뻗은 길들을 맘껏 찍을 수 있었다.
강을 건너고 산을 지나 싱그러운 초록빛 길로 접어드니, 문득 이메 님의 따뜻한 시 <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왜 있잖아요, 살다보면/ 딱 한 번 가고 온 것뿐인데/ (중략) / 눈감아도 선한 / 조금은 미안한
지금 지나고 있는 단양의 길들도 내 가슴에 찍혀, 눈을 감아도 선하게 떠오를 길이 돼 주겠지. 그때쯤 나는 이 길들에게 미안할까 미안하지 않을까...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판가름 날 테지만... 길에 대한 단상에 빠져 있는 사이 차는 내내 남한강을 끼고 달린다. 온달관광지가 있는 영춘면으로 가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혼자여도 좋고 여럿이어도 좋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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