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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여행/체험

사진으로 떠나는 추억여행, 2007년 서울의 거리풍경

 

오랫동안 컴퓨터에서 잠자고 있던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추억의 거리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10년을 넘게 우리 집 근처에 살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막내언니네가 정릉으로 이사를 간 직후였다. 집들이 겸 그새 보고 싶어진 조카들을 보러 언니네로 가던 날이었다. 날짜를 보니 2007년 이맘때, 꼭 6년 전이다. 

사당동과 총신대 입구를 거쳐 동작대교를 타고 용산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부터,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내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익숙한 거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따뜻한 추억의 군불이 지펴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추억이 남아 있는 거리들이 있다. 세월이 흘러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거리들과 만나게 되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몽실몽실 아련한 향수가 피어오른다. 

기억에 갇혀 있던 거리들이 되살아나고,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거리를 함께했던 사람들과 내 뒤를 카메라가 따라오며 추억의 필름을 돌린다. 때로는 흑백이고 때로는 선명한 컬러 화면이다. 

 

 

이제 막 영화가 시작되었다.

동작대교에서 이촌역을 끼고 내려와 예전 고모네가 살던 미군 장교 사택 앞에서 턴을 하여, 지금은 용산가족공원으로 변모한 거리를 지나친다.
고모부는 고위급 작전참모였다. 사택이 부대 안에 위치하고 있어, 고모네에 갈 때마다 입구에서부터 깐깐하게 신분을 확인하던 기억이 난다. 집은 그다지 넓지 않았는데 복층 구조였고,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있었다. 
아빠가 살아 계셨을 때니 10년도 훨씬 더 된 이야기다. 꼬마였던 고모 아들은 다시 돌아간 미국에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을 터. 뒷자리에 탄 엄마와 운전을 하던 오빠가 그때를 회상하며 얘기꽃을 피운다.

 

 

용산가족공원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출판사를 그만두고 1년 남짓 아르바이트를 했던 옛 세계일보 길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만 해도 이렇게 큰 길은 없었는데, 이미 용산 개발이 시작되어 길들이 달라져 있었다. 

세계일보 구 사옥은 5층짜리 건물이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월간지 '세계여성'은 그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다. 기자들의 휴게실이자 사랑방이었던 옥상과 구내식당의 푸짐했던 점심이 생각난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몇몇과는 지금도 가끔 연락한다.

  

 

건너편에 옛 중앙대병원이 보인다. 이 근방에서는 한국 베링거인겔하임과 옛 국제상사 건물도 유명했는데, 지금은 모두 이전을 하거나 리모델링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건물 이름 앞에 몽땅 '옛'이라는 관형사를 붙여야 할 판이다. 
친구 한 녀석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국제상사 지하의 레코드 숍에서 헛헛한 마음으로 구창모의 '희나리' LP를 사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중대병원 앞에서 우회전하여 쭉 직진하면, 배호의 노래로 유명한 삼각지 로터리가 나오면서 남산타워가 정면으로 보인다. 한때 이곳은 맛있는 곱창 집과 화랑거리로도 유명했다. 
화랑, 화실, 액자공방 등으로 이루어진 삼각지 화랑거리는 미군 초상화 판매로 시작해 60, 70년대엔 수출용 그림인 ‘쫑쫑이 그림’으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거리를 지키는 가게들이 많았다. 
막내언니가 전시회를 할 때마다 이곳에서 액자를 맞추곤 했는데, 그 그림들을 전시회장으로 실어나르던 기억 또한 새롭다.

 

 

계속 직진을 하면 동시상영관인 성남극장과 금성극장이 있던 남영동으로 접어든다. 
나는 이 근처에 있던 재수학원을 다녔다. 아침마다 두 극장을 지나쳐 학원에 가곤 했는데, 극장에 걸려 있던 약간은 조악하고 원색적이었던 간판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쉽게도 두 극장에서 실제로 영화를 본 적은 없다. 근처 술집은 뻔질나게 애용했는데도 말이다. ^^
 

 

남영동을 지나면 좌측에 서울역이 나오고, 우측으로는 남산타워가 눈앞에 보이는 후암동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힐튼 호텔이 나오고, 거기서 우측으로 턴해 조금 더 올라가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이 나온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자주 다니던 곳이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도시관 식당에서 먹던 가락우동도 잊을 수 없다. 면발은 툭툭 끊어지고 맛대가리 하나 없던 그 우동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이제는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진 내 여고 동창생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 있던 고가도로. 이 중 남영동 방향으로 뻗어 있던 고가도로는 철거되었다. 
예전에는 남대문시장부터 이 고가도로를 타고 남영동 쪽으로 내려갈 때까지 차들이 밀리곤 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고가도로 위에 정차해 있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옴짝달싹 못한 채 서울역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아무 기차나 집어 타고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한때는 위용을 과시하던 서울역 맞은 편의 갈색빛 대우빌딩도 기억난다. 

 

서울 시내 한복판을 가로질러 정릉으로 가는 길, 이제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앗, 저것은 예전 모습 그대로의 숭례문이다!

 

 

2008년 2월 방화로 전소되었으니, 소실되기 3개월 전쯤의 숭례문인 셈이다.
국보 1호라고는 해도 무심히 지나치기만 했던 곳인데,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숭례문을 보니 가슴이 찡하다.

 

 

복원공사를 아무리 잘한다 한들 옛것만 같겠는가. 하긴 그조차도 제대로 못해 요즘 한창 시끄럽지 않은가.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방금 막 지나친 곳은 노란 단풍잎으로 물든 덕수궁이다. 늘 관광버스와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나저나 저 뒤편의 덕수궁 돌담길은 잘 있으려나? '그대 없이는 못 살아~♬' 어쩌구 하면서 돌담길을 함께 걷던 머스마들도 다 잘 있겠지? ㅋㅋ
  

 

덕수궁 맞은편으로, 현재는 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서울시청 구청사가 보인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시청 앞에 대형 트리가 세워지곤 했다. 1980년대 그러니까 내가 청춘일 때만 해도 그렇게 큰 트리는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일부러 시청 앞까지 트리를 보러 가는 데이트족들이 많았다. 
딱 한 번 나도 그들 중 한 명이 되었는데, 내 몸집만한 곰인형을 선물로 받아 낑낑거리며 들고 갔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풋풋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다 보니 신문사 건물들로 가득 찬 태평로에 접어든다.
출판사를 다닐 때였다. 신간이 나오면 꼭 책 몇 권과 보도자료를 누런 봉투에 담아, 각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들에게 직접 전달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신문기사가 가장 큰 홍보수단이었는데, 때는 그게 그렇게나 싫었다. 
생각해 보라. 안면도 없는 기자를 찾아가 온갖 아양을 떨며 잘 좀 써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세상 물정 몰랐던 나로서는 그보다 더 치사한 일이 없었다. '내가 이 일 하기 싫어서라도 때려치고 만다!' 했으니, 애저녁에 이 바닥에서 성공하긴 글렀던 셈이다. 
저만큼 떨어져 있는 중앙일보부터 시작하여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차례차례 들르곤 했다. 거리는 또 어찌나 황량하고 바람은 또 어찌나 세게 불던지, 한여름에도 추워했던 기억이 난다. 역시 어떤 일에나 그놈의 마음가짐이 문제였다. 

 

 

그새 차가 광화문으로 들어선다. 
오, 저기 우리의 이충무공 동상이 보인다. 버스 광고판 위에서 웃고 있는 결혼 전의 이병헌도 보인다.
이때만 해도 세종대왕 동상은 세워지기 전이었다. 

 

 

충무공 동상 뒤편으로 간간히 공연을 보러 가던 세종문화회관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 공연 중 장 피에르 랑팔의 플루트 연주회가 가장 인상 깊었다. 아직도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풀루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맞은편 교보문고에서는 좋은 글귀를 새겨 넣은 대형 현수막을 그것도 계절마다 다르게 걸어놓곤 했는데, 아직도 걸려 있나 모르겠다. 언젠가 걸려 있던 괴테의 문구가 떠오른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 
   

 

자, 이제 이 사진여행의 마지막 추억 지점인 비원과 창경궁 길을 지나고 있다.  
서울시 중구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분에, 국민학교 때 단골로 소풍을 가던 곳이 바로 비원과 창경원이다. 
하얀 타이츠에 반바지를 입고, 선생님과 동무들과 함께 나무 도시락에 싸간 김밥과 환타(나는 사이다보다 환타를 좋아했다)를 먹으며 깔깔거리던 어린 시절의 내가, 저 담장 안에 있다.

 

 

릴케는 말했다.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한편으로는 슬프면서 잔인하고, 그리워해 봤자 달라질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 이것 또한 추억이다. 
그러나 그리워하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 역시, 자신의 삶에 있어 아름다운 추억을 더 많이 남기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오늘이 다시 어제가 되었을 때, 자신을 감싸안아 줄 따뜻한 추억들과 만나게 된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도 없을 듯싶다.
특정한 장소, 음식, 흘러간 음악과 영화 등도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사진만한 매개체가 없다.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추억과 그리움!  떠나가는 가을 배웅하면서 맘껏 사진도 찍고, 이 특권만큼은 원없이 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