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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 人

건망증

 

무엇이든 잊지만 않으면 잃을 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내 소중한 것들을 잊지 않았더라면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에도 덜 추울 수 있었을 텐데
왜 그 쉬운 걸 자꾸만 까먹고 마는 걸까요.

 

장래희망이 무엇이냐 물으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어릴 적 꿈을
감동 속에서 읽고 보고 들었던 아름다운 책과 영화와 노래들을
두근두근 설레는 가슴으로 속삭였던 사랑의 고백을
항상 변치 않고 곁을 지켜주겠다던 우정 어린 약속을
진심으로 아껴주던 이들에게 돌려줘야 했던 고마운 마음을
비틀거리면서도 옳다고 믿었던 자신의 신념과 손해보더라도 착하게 살자던 굳은 맹세를

 

정말이지 그 좋은 것들을
어떻게 이리 쉽게, 이리 자주, 잊어버릴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좀 모자란가 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고 잊어야 할 것들만 잔뜩 껴안고 있으니.

 

 

다행히 전방 100미터 앞에 U-turn 표지판이 보입니다.

저 아득한 유년에서부터 시작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잊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찬찬히 살펴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잊고 싶었던 기억도 함께 떠오르겠지요.
상처로 그리움으로 덧없음으로 꼭꼭 숨겨놓았던 기억들 말입니다.
내 안에서 살아 숨쉬는 한 그것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망각은 복수가 될 수 없습니다. 잊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는 않으니까요.
더 열심히 맘에 품고 있다가 딱지가 저 혼자 떨어질 때, 그때 잊어도 늦지 않습니다.

삶이 지나친 자리마다 꽃이 피어 있습니다.

그걸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남은 여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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