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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 人

정지(情地)

 

 

 

  그녀가 미소 짓습니다.
  온통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그녀가 누군가의 곁으로 하염없이 걸어갑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귓불에서 흔들리는 지난날 한짝.

  그녀가 거기 있습니다.

  저는 이만큼 물러서서 그녀의 뒷모습 어디쯤 쓸쓸함이 묻어 있나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단발머리 나풀대며 제게로 왔던 그녀.

  그녀의 가녀린 손이 머뭇머뭇 빳빳하게 풀 먹인 와이셔츠의 손을 잡습니다. 아, 비겁하여라.

  기우뚱 그녀의 어깨가 기웁니다. 저 너머 흑백필름 속의 그녀가 말합니다. 난 너밖에 없어.

  빈털터리가 된 저는 그녀의 눈부신 드레스에 콧날이 다 시큰합니다.

  천천히 돌아선 그녀의 이편을 향해 직각으로 허리 굽히는 얼굴이 낯섭니다.

  한 겹의 두터운 화장 속으로 그녀와 저의 나날이 흘러가고 눈물 한 방울 외로운 길을 만듭니다.

  눈이라도 마주칠 요량으로 고개 빼꼼 내밀어 보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제 편에 있지 않습니다.

  팔짱을 낀 그녀가 다가옵니다. 어느새 그림자가 둘.

  스르르 흑백필름이 멈춥니다. 情地를 찾아 그녀가 떠나간 날에.


  - 그녀의 결혼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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