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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여행/체험

[꽃집 일기 1] 꽃집의 아가씨?

 

로즈마리와 함께 대표적인 허브 중 하나인 라벤더(Lavandula angustifolia).

꿀풀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 손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상큼한 향기가 난다. 연보랏빛 꽃에 어느새 벌이 날아들었다.

 
 
  [prologue]
 
  봄빛이 천지를 물들이기 시작하던 4월의 첫째 주 토요일, 언니들에게 전화가 왔다.
  올해는 식구들끼리 모여 해마다 해오던 주말농장을 하지 않게 되어, 각자 집의 마당이며 베란다에 심을 모종과 꽃을 사기 위해 꽃집에 들렀단다.
  엄마가 좋아하는 토마토랑 상추 등의 모종도 따로 사놓았다면서, 조만간 집에 와 엄마랑 같이 심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
  "꽃집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주인아주머니께서 아르바이트 할 사람 좀 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시는데, 막내 네가 한번 해볼래?" 한다.
  어릴 때부터 화분 하나 갖고도 몇 시간이고 조물락거리며 놀기 좋아하던 내가 생각나서였으리라.
  게다가 요 몇 달 눈에 띄게 줄어든 출판사 일과, 글 쓰고 사진 찍는 일에도 점점 심드렁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저것이 장차 어찌 살려고 저러누!' 하며 속이 터져서였겠지.
  울 강쥐를 베개 삼아 벌러덩 드러누워서 조카에게 선물로 받은 김훈의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의 첫 페이지를 막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그래? 꽃집이라고! 뭐시라? 7시 반에 출근해서 5시 반에 퇴근? 장장 10시간 근무라고라? 근데 월급은 쥐꼬리고? 게다가 쉬는 날도 없이 달랑 한 달에 두 번 논다고? 켁켁!"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와 오빠가 웃음을 참으며 나를 쳐다본다.

  왜 그랬을까. 그때, 대체, 내가, 왜, 겁도 없이 알았다고 해버렸을까. 식구들의 반응 때문이었을까.
  네가 그런 악조건의 일을, 그것도 아르바이트라면 20대 초반에 딱 한 번(그것도 오빠가 온갖 배려를 다 해주었던 롯데 백화점 크리스마스 카드 판매- 아, 생각난다. 그때 아빠를 비롯한 온 집안 식구가 장한(?) 내 모습을 보기 위해 백화점으로 총출동해서 동료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었다) 해본 것이 다인 네가, 더구나 이케 나이 먹어서리 꽃집 알바라고 할쏘냐 하는 식의 반응 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생활을 완전히 바꿔 보는 것도 지금의 내게는 독이 아닌 약이 되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글을 쓰거나 출판사에서 맡은 일들은 주로 밤이나 새벽에 하기 때문에, 아침이 어떻게 생겨 먹은지 잊은 지 오랜 데다가,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게 되면 언제부턴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매너리즘에서도 벗어날 길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참말로 순진한(!) 생각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쓰지는 않고 계속 미뤄 두기만 했던 소설의 소재도 찾을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감도 한몫했다.
  내 반응이 예상 외로 긍정적인 것에 놀란 언니들이 당장 꽃집으로 와 보란다. 직접 와서 주인아주머니랑 얘기해 보고 최종 결정을 하란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이런 일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며 나보다 더 신이 나서는, 
  "또 알아? 이걸 기회로 꽃집이라도 차리게 될지!" 한다.  

  어쨌거나 나는 평화롭던 토요일 오후를 반납하고, 내비게이션에 꽃집 주소를 적어 넣은 채 생전 처음 가보는 동네 구경에 나섰다.
  운전을 하며 가는 내내,
  '졸지에 이게 뭔 일이람? 내가 다니겠다고만 하면 세상에, 나도 그 유명한 꽃집의 아가씨가 될 수 있단 말이지!' 하면서,
  저 불멸의 노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하긴 꽃집의 아가씨라 하니 좀 찔리긴 한다. 그 풋풋하고 상큼한 아가씨의 이미지가 떠올라서리. 그치만 늙은 아가씨도 아가씨는 아가씨지, 뭐! 고럼고럼, 흐흐흐.
  혼자서 히죽거리며 도착한 곳은 규모가 엄청 큰, 정확히 말하면 동네에서 흔히 보던 화원이 아닌 '농원'이었다. 그것도 소매상이 아닌 도매상인.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때 나는 도매와 소매의 차이점조차 알지 못했다.
  생화만 파는 도심의 화원보다는 하우스로 지어져 있는 농원을 더 선호했던(그게 더 꽃집 느낌이 제대로 났다) 나로서는 그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상쾌하게 코끝을 찌르는 온갖 나무와 꽃의 내음에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것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내 어찌 알았으랴. (ㅠ.ㅠ)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세 번 놀란 것 같다.
  내 나이와, 아직도(!) 미혼이라는 것과, 언니들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 챙기듯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것에 말이다. (참, 언니들을 따라온 울 조카도 그 보호자 중의 한 명이었다. ㅋㅋ)
  하는 일은 간단하단다. 손님이 꽃을 사면 비닐이나 종이 박스에 포장을 해주고 차까지 운반해 주면 끝이란다. 문제는 아침 일찍 나와야 하는 것과 꽃집의 대목인 4, 5월에는 한 달에 두 번밖에 쉴 수 없는 것뿐이란다.
  그러면서 주인아주머니는 한 계절만 당신과 함께 일하고 나면 꽃집의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미끼(?)까지 던져 주신다.
  나보다 더 열심히 물어 보고 대답하던 언니들이 그 미끼를 덥석 문다.
  "그래그래, 네가 한번 다녀보다가 할 만하다 싶으면 우리라도 엄마랑 꽃집 하나 하지, 뭐. 네가 정 힘이 들어 못 다닐 것 같으면 그땐 관두면 되는 거고."
  그러고는 주인아주머니께,
  "우리 막내가요, 잘 안 먹는 데다가 몸도 비리비리하거든요. 그러니 이참에 운동 삼아 다니다 보면 오히려 전보다 밥도 잘 먹고 건강도 좋아지겠네요. 꽃도 실컷 보고요." 하며 너스레까지 떤다.
  언니들의 말에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던 주인아주머니는(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주머니의 그때 표정이 '에고~ 이 철없는 사람들이여!' 했던 것 같다) 나를 한참 쳐다보시더니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 하신다.
  내가 너무 놀라 "낼은 일요일인데요!" 하니, 한숨을 푹 내쉬시면서 그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신다. 지금이 제일 바쁠 때니 사정 좀 봐달라 하시면서.
  에라, 모르겠다. 좋다! 까짓거 뭐, 살면서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냐! 이미 엎질러진 물! 
 
  아, 나의 꽃집 일기는 바야흐로 이렇게 하여 쓰여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