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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여행/체험

[꽃집 일기 4] 당신은 어떤 손님?

모처럼 한가한 점심시간에 꽃집 도로변의 벚나무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자니,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한 꽃망울이 두둥실 구름을 타고 유랑하는 세월의 눈망울 같다.

 

 

[출근 1개월 次]

 

꽃집은 봄이 시작되는 3월을 기점으로 4, 5월이 가장 바쁜 때이다.

특히 4월 중순부터는 부활절과 5월 초의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등의 대목을 맞아 눈코 뜰 새가 없다.

2주일 만에 하루 드디어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근하는 길. 어째 피곤이 풀리기는 커녕 더 쌓인 듯하다.

그러나 내게도 인간의 가장 위대한 장점 중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적응력이다.

쉼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비례하여 조금씩 일도 손에 잡히고 손님들도 낯이 익기 시작했으며,

제법 많이 팔리는 꽃과 나무에 한해서는 그 이름과 가격도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만 빼고. 여전히 일반인과 장사하는 이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

단골손님들은 하루나 이틀 터울로 다녀가므로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지지만,

문제는 가끔씩 오는 손님과 일반인을 혼동하여 도매가를 불러야 할 때 소매가를 부른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처음 본 손님을 상대할 때는 무엇보다, 소매가로 부를지 도매가로 부를지를 재빠르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어디 그런 재주가 내게 있겠는가. 결국은 어영부영하다가 주인아주머니만 힘차게 부를 수밖에.

1, 2주 때야 모르는 것이 그리 흠 잡힐 일도 아니었지만, 한 달이 돼 가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은

주인아주머니 보기에도 손님들 보기에도 민망한 일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그 구분이 쉽지 않으므로 가격에는 관여치 말라던 주인아주머니도, 3주째 접어들자 슬슬 당신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

아주머니의 노하우는 참으로 간단명료했다. "손님의 신발을 보라!"

신발에 흙이 묻어 있거나 낡고 지저분하면 90%는 장사하는 이들이라는 것. 와와~ 이리 명쾌할 수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무얼 그리 어렵게 구별하려고 애를 쓰는지? 그냥 물어보면 될 것을 말이다.

도매꽃집 경력 10년에 빛나는 주인아주머니께서도 정 구별이 안 되는 손님들에게는 "꽃집 하세요?"라고 대놓고 물어보신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네!" 한다. 그 아홉 중 다섯은 거짓말이다.

나 같은 초보가 보기에도 영 아닌 것 같은 사람들까지 꽃장수인 척한 것이다. 왜냐? 딱 한 가지 목적 때문, 물건을 싸게 사기 위한.

처음에는 도무지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가 묻고 또 물었다.

"아니, 그럼 저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꽃값 좀 깎겠다고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예요?"

흥분해서 묻는 나를 혀를 차며 바라보며 주인아주머니가 대답한다.

"그렇다니까. 쯧쯧, 이리 세상 물정을 몰라 어찌하누!"

에고고, 내는 아직꺼정도 잘 모르것다. 거짓말하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세상 물정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꽃집에서 연탄난로는 요긴한 난방 수단이다. 품이 들기는 하지만 저렴하기 때문인데, 대략 5월까지는 연탄을 땐다.

주인아주머니를 도울 요량으로 일단 "제가 갈게요!" 하고 큰소리는 쳤는데, 정작 연탄집게를 사용할 줄 몰라 한참을 헤맸다.
알고 보니 한 장씩 중심 구멍에 맞춰 끼운 후 두 장을 한꺼번에 집어올려야 하는 것. 에고, 죄없는 연탄만 왕창 깨먹었다.
(참참, 연탄은 타기 전과 타고 난 후의 무게가 달랐다. 타고 난 후의 연탄이 훨씬 가벼웠다. 신기혀라, 신기혀라! )

 

 

이즈음 내가 아주머니께 가장 많이 듣던 말은 "언니, 이런 일 안해 봤구나." 였다.

이런 일의 종류는 꽤 다양하다.
연탄 갈기, 흙바닥 비질하기, 쓰레기 알뜰하게 줄여서 버리기, 간이영수증 쓰기, 싫은 사람에게도 방긋방긋 웃어주기 등등이다.
봄이 깊어지면서 주말에 꽃집 나들이를 하는 일반인 손님도 부쩍 늘었다.
꽃집이 시내와는 좀 떨어져 있어 대중 교통 편으로는 오가기 힘든 관계로 그들 대부분이 자가용을 이용한다.
으스대듯 고급 승용차를 몰고 와 떡하니 주차장 한가운데 차를 멈추면, 백이면 백 일반 소비자인 셈.
놀라운 것은 차가 고급이면 고급일수록 오히려 물건값을 더 깎는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
알바계의 대선배인 조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며 "차가 다 아깝더라" 했더니, 히죽거리며 듣고 있던 조카 왈.
"에이, 이모. 뭘 그런 걸 갖고 열받고 그래. 그렇게 열심히 깎고 살아서 그 차 샀나 보지, 뭐. 부자가 괜히 부자겠수!"
컥, 한 방 먹었다. 역시 알바는 어릴 때부터 하고 볼 일이여. 존경한다, 조카야!

 

 

시클라멘. 꽃말은 수줍음이라고 하는데 꽃이 피면 고개를 숙이는 성질이 있어 그런 꽃말이 붙었다고 한다.

겨울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봄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한다. 3, 4월 꽃집의 대표 주자이다.

 

 

베고니아. 예로부터 관엽식물로 애용된 꽃으로 다양한 개량 품종이 있다. 다른 꽃에 비해 손이 안 가고 가장 오래 가는 꽃이다.

꽃말은 짝사랑! 거참, 그래서 손이 안 갔나 보다. ㅎㅎ

 

 

평일에는 단골손님, 주말에는 일반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봄날의 꽃집.
아이러니하게도 꽃집에서 맞는 봄날은 더이상 봄날이 아니었다.
벚꽃이 언제 피고 지는지도 모른 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더니, 세상에 정말로 운동화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게다가 바야흐로 본격적인 꽃집의 성수기에 돌입했으니,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아니나 다를까, 부활절과 석가탄신일이 다가오면서 대형 화분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품종은 철쭉과 이태리 봉숭아, 하와이 무궁화, 수국 등이었다.
성당이나 교회의 경우, 단상을 중심으로 양옆에 놓을 꽃을 찾기 때문에 대부분 두 개가 한 세트로 판매된다.
꽃집에 앉아서도 종교 기념일 덕분에 스님에서부터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까지 두루두루 다 만나 볼 수 있었다.
그들도 무척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꽃값은 무조건 깎고부터 보는. 인간은 역시 평등한가 보다. ^^

 

 

 

진달랫과의 낙엽 활엽 관목인 철쭉. 꽃말은 사랑의 기쁨과 줄기찬 번영.

철쭉은 이 줄기찬 번영이란 꽃말 덕에 성남 시의 상징 꽃으로도 활동 중이란다. 판매용으로는 순백의 흰 철쭉이 대세였다.

 

 

 

꽃집에서는 이태리 봉숭아로 불리던 꽃.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아프리카 봉선화(Garden impatiens)로 나와 있다.

하양, 연분홍, 진분홍, 주황, 빨강, 보카시(두 가지 색이 섞여 있다는 뜻. 유감스럽게도 꽃집 또한 일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등등으로

색이 다양하고 물을 엄청 좋아하며 꽃도 계속해서 올라온다.


 

 

위의 것은 하와이 무궁화, 아랫것은 덴마크 무궁화. 얼핏 보아서는 구분이 잘 안 된다.

다만 가격으로는 구분할 수 있다. 훨씬 비싼 것이 덴마크 무궁화. 꽃이 피는 대형 화분 중 산수국과 함께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 무궁화가 제일이다.

 

 

 

 

 

 

산수국, 나무수국, 풍차수국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에 따라 생김새도 색깔도 제각각 달랐다.

일본이 원산지이며 꽃말은 교만, 허풍, 변심, 냉담, 처녀의 꿈 등이라 한다.

개인적으로는 남보랏빛 청수국이 가장 예뻤다. 꽃송이가 파란빛을 띤 것을 본 적 있는가. 그 희귀성 때문에라도 대접받는 꽃이었다.

 

 

이 꽃을 지나칠 때마다 파란 향내를 맡을 수 있을까 싶어 코를 킁킁거리곤 했다. 아쉽게도 거의 향기가 나지 않았다.

햇살이 따가워지면서 잘 팔리는 품목이 하나 더 늘었다. 걸이용 화분들이다.

손님들이 큰 바가지 작은 바가지 해서 무슨 소린가 했더니, 화분 모양이 바가지 같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란다.
꽃집 마당과 도로변에 줄지어 놓으면 광고할 필요가 따로 없다. 지나가는 이들마다 그 진분홍빛 유혹에 넘어가 차를 세우고 가격을 물어보기 일쑤였으니.

 

 

일명 사피니아. 화단 나팔꽃이라 불리는 피튜니아의 개량종이다. 가로등이나 다리에 관상용으로 많이 걸려 있다.

특히 우리 꽃집에서 파는 사피니아는 주인아저씨가 아랫녘 농장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것으로, 꽃색깔이 선명하고 발육 상태가 좋아 인기 짱이었다.

 

 

목마거리트. 연분홍과 진분홍이 섞여 있는 화분이 가장 잘 팔렸다. 잎 모양이 쑥갓 같다 하여 나무쑥갓이라고도 불린다.

서양에서는 이 마거리트로 꽃점을 치기도 했단다. 어디 나도 한번 꽃잎 한 장 한 장 떼내면서 사랑 점이나 쳐볼까나.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으흐흐, 괜히 쳤어~ 괜히 쳤어~잉! (ㅋ.ㅋ) 

 

 

레니엄 벨. 마치 사피니아의 미니어처 같다. 걸이용 화분 중에서는 가장 비쌌는데도 올망졸망한 꽃송이 때문인지 잘 팔렸다.

거금 2만 원. 그것도 도매가로. 주로 규모 있는 상가나 하우스 상인들이 많이 사갔다. 

 

꽃이 고와야 나비가 모이는 것처럼, 무슨 장사를 하든 상품이 좋아야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인근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우리 꽃집은 주인 내외분의 부지런함과 상품의 품질이 좋아 늘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그곳에서의 생활 한 달 남짓,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사람과 만났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성치 않은 몸으로도 물건을 떼러 오는 장사꾼들과, 그저 기분 전환 삼아 거드름 피우며 꽃을 사러 오는 졸부들에,

알콩달콩 깨소금 냄새를 폴폴 풍기는 신혼부부, 손자들 용돈이라도 줘야 한다면서 굳건히 5일장을 지키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꽃이 최고의 인테리어라는 프랑스풍 레스토랑의 사장님, 스리랑카에서 꽃집을 한다는 외국인 노동자, 성직자에 공무원, 대학교 교수님에 유치원 선생님,

플로리스트에 피아니스트까지.

 

 

 

봄이 무르익어 가는 오후, 한때는 그리도 꿈꾸던 꽃집 생활이건만 평화롭기 그지없는 바깥 세상을 바라보니...

아, 버스여! 자전거여! 댑다 집어 타고 떠나고 싶어진다. 이 마음의 간사함을 어찌하면 좋을꼬... (ㅠ.ㅠ)

 

손님을 맞이하는 입장에 서니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꽃의 향기보다 사람의 향기가 훨씬 진하다는 것.
지위 고하나 겉모습과 관계없이 풍겨 나오는 이 향기는, 때로는 향긋하고 때로는 고약하다.
손님이든 주인이든, 그 향기 중 단연 으뜸은 친절함과 상냥함이 아닐는지.
일에 지쳐 멍하니 있다가도 씨익 웃어 주는 손님들의 미소와 친절한 말 한 마디에 용기가 불끈불끈 샘솟는다.

 

 

어느새 떨어져 내린 벚꽃 잎이 시간의 융단 위로 살포시 쌓인다. 행여나 밟을세라 조심조심 벤치 귀퉁이로 가 봄에게 말을 건다.

"봄아봄아, 너는 내게 참 귀한 손님이었는데 나는 네게 어떤 손님이었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