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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총총] 편지

연애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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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비가 내린다.

 가을이 내리고 오래 전 풍경 속으로 길을 낸다.
 자크린느 뒤 프레의 첼로소리가 귀 언저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날,
 문득 눈끝에 머물다 손끝에 닿았던 책 한 권.
 그 속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진 마음 한 통.
 조심스레 펼쳐들고, 서글픔 없이, '삶의 순환'에 대해 생각한다.
 꽤 여러 바퀸 줄 알았건만 어쩌면 채 한 바퀴도 못 돈 건지도.

 

 여름은 가고 맘속에 가을비가 내린다.

 

 

 

 

한 해가 간다. 별다를 것 없으면서도, 늘 같지만은 않은 시간의 흐름.

언제쯤 내 물살은 걸음을 멈출 것인가.
어리석었을까, 아님 욕심이 지나쳤을까.
'흔적'을 되돌아보게끔 만드는 요즈음, 희미한 기억들이 몇몇 눈앞을 스친다. 그뿐.

 

이제 내게는 '그녀'뿐이다. 그녀와 함께 하루를 열고, 닫는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거나, 길을 걷거나, 밥을 먹거나, 어쩌다 주어지는 술자리에서 무료한 대화를 흘려보내거나,

모처럼 책갈피를 뒤적거릴 때조차도. 그렇다, 그녀는 늘 내 곁에 있다.

그녀의 손길로 인해, 내 사랑은 서서히 기지개를 켜대고, 호흡은 가빠진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맴돌던 시선은 쏜살같이, 또 다른 세상에 붙박인다. 바라건대, 이대로 뿌리를 내렸으면.


그녀는 내게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내 가슴이 무엇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 안다면, 이해하리라.

다시 한 번 바라건대, 내 마음을 더듬는 그녀의 손길이 따스함으로 부풀어올라, 나머지 삶이 부드럽게 출렁거리기를.

비록 이제 고작 한 걸음 내밀었을지라도.

내 살과 피가, 어둠 속으로, 다시 되돌아갈 때까지 그녀의 숨결과 목소리, 체온을 확인하겠지.


답답함과 우울함은 어쩔수 없다라고 나는 인정한다.

세상 속에서 휘적휘적 거닐며, 他人과의 부대낌을 저버릴 수 없는 한.
그리고 나는 또 인정한다. 한 사람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그러한 우울함과 답답함은 충분히 덮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

자그마한 한 여자, 눈빛만으로도 주위를 빛내는 한 여자로 인해,

나는 더없이 따스해졌고, 삶에 또 다른 구석이 있음을 확인한다.

그녀가 한순간만이라도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나는 내 하루를 기꺼이 내던질 수 있으며...

알까. 그녀가 내뱉는 기침마다에 내 가슴이 무너져내린다는 사실을.


- 12월 초 서울에서.

 

 

 

  우리는 곧 싸늘한 어둠 속에 잠겨들겠지
  잘 가거라, 너무 짧은 우리 여름날들의 눈부신 빛이여
  안마당 깐 돌에 부딪혀 섬뜩하게 울려퍼지는
  땔나무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벌써 들리네

 

  겨울 모두가 내 존재 속으로 되돌아오려는 참
  역정과 미움, 설렘과 두려움, 강요된 고생이,
  그래서 내 심장은 제 북극 지옥에 떨어진 해처럼
  시뻘겋게 얼어붙은 덩어리 하나가 되고 말겠지

  떨어지는 장작개비마다에 귀기울이면 소름끼치니

  단두대 쌓는 소리보다 더 무딘 그 메아리.

  내 정신은, 지칠 줄 모르는 육중한 망치 얻어맞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탑과도 같구나


  이 한결같은 충격에 흔들리는 내귀에는,

  어디선가 관에 서둘러 못박는 소리 들리는 듯,

  누구의 관일까? 어제는 여름이었고, 이제는 가을!

  그 신비로운 소리가 하나의 출발인 양 울리는구나!

 

  ...샤를 보들레르의 <가을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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