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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총총] 편지

 

 

  하늘은 흐리지만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좋은 날, 너를 생각하며 편지를 쓴다.
  추억이 꼬리를 물고 다가서면 살며시 떠오르는 미소.
  그 오랜 시간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구시렁거리면서도 말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좁은 테두리 속에서만 나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인류의 또 한 사람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삶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또 그 삶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타인을 인정하는 이상,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추하더라도
   우리들의 삶은 모두 그 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테니까."
 
  "나는 깊은 연대에 뿌리박힌 열렬한 기억을 도려내서라도
   그녀의 상채기에서 뚝뚝 방울져 흐르는 핏방울을 '세월'로 훔쳐주려고 했다."
 
  소세키의 <유리문 안에서>다.
  이 책을 뒤적일 때마다,
  티끌 한 점 없이 맑게 닦인 유리문 위로 눈부신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광경이 떠오른다.
  내가 어느 쪽에 있느냐-유리문 안쪽이냐 바깥쪽이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기도 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유리문 안쪽의 시간은 추억이요 바깥쪽은 세월이리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번화함과 고즈넉함이 교차되는 네 사무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어느새 마음에 새겨졌다.
  고군분투하는 너의 힘겨움을 훔쳐줄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소리 없이 강한 것. 역시 소세키 말마따나 세월이려나.
  흐흐 아니다, 그보다는 역시 당장의 술 한잔이다. 그 안에 녹아 있는 정이요 사랑이다.
  기운 내라!  절뚝거리면 어떠하더냐.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대책이 안 선다고 질 수는 없다. 내가 솔직하기 때문에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는 거다.
   하지만 결국 이 세상에선 정의가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다.
   오늘 밤 안으로 못 이기면 내일 이긴다. 내일도 이기지 못하면 모레 이긴다.
   모레도 이기지 못하면 하숙집에 도시락을 싸달라고 부탁해서 승리할 때까지 이곳에 있을 것이다."  -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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