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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총총] 편지

가로등을 켰습니다

 

그에게로 가는 길은 폐허가 된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 같습니다.
화려한 영광을 뒤로하고 노을이 지고 있는 그곳에, 그가 있습니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그가 불치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었지요.
누구보다 심지가 굳고 강단 있던 분이셨기에 지금의 초췌해진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그를 만나러 갑니다.
희망을 잡기에도 힘겨운, 인생의 외로움과 체념만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그의 손을 잡아 드리기 위해섭니다.  
이때만큼 자잘한 걱정거리와 불평을 달고 사는 저 자신이 한심해지는 때도 없습니다.

출판사에 다닐 때니 벌써 10년도 훌쩍 뛰어넘는 인연이지요. 
마음 한켠에 얌전히 개켜져 있던 지난 시간들이 어제처럼 생생히 떠오릅니다.
5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살뜰히 아껴주셨던 분에 대한 애틋함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에 어쩌다가, 하는 저절로 나오는 한숨 때문일까요.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져야 할 인연이 서글프게만 느껴집니다.

하루하루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싸워나가고 계시는 그분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힘 내시라는 말조차도 너무 가볍게 느껴지니까요.
그저 가끔씩 찾아뵙고, 좋았던 옛날을 추억하게 해 드리고, 귀를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올 때쯤 절망으로 야윈 손을 잡아드리는 것. 그것이 다입니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삶에 대한 헛헛함으로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외로워하고, 일어서고 넘어지고, 얻고 잃고...
참말로 어리석게도 끊임없이 순환되는 감정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로, 
매순간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며 살겠지요.
그렇게 살다가 맨 마지막 문 앞에 이르러서는 '한바탕 꿈이었노라!' 한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하찮게만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부질없음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한 바퀴 원을 그리던 생각이 멈추자, 시동을 걸려던 손으로 눈길이 갑니다.

제 손을 꼬옥 쥐어주셨던 그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찔러대는 헛헛함을 밀쳐내며 눈을 감습니다. 1분만이라도 그를 위해 마음을 다해 봅니다.

 

희망을 놓지 않으시기를.

덧없고 또 덧없다 하여도 더 애써 보시기를.

행복했던 순간들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를.
그리고 가끔 기억해 주시기를.

먼 발치에서라도 당신의 어두운 골목길에 조금이라도 빛이 될까,
가로등을 켜둔 사람들이 있음을.
당신의 따스했던 손의 체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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