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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여행/체험

욕심이 유배되는 섬, 南海 4

 

 

 

  결의에 차서 발길을 돌리니 어느새 남해읍에 도착했습니다.
  남해읍 거리 풍경입니다.

 

 

 

 

  남해군에는 한 개의 읍과 아홉 개의 면이 있다 하니 이곳이 가장 번화가인 셈입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동네 풍경은 생경하면서도 동시에 정겹습니다. 이것이 한민족만의 정서겠지요.

  남해는 어느 곳이든 아늑하고 고요한 느낌이었습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여인네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 속에 우리네 어머니의 강인함을 감추고 있는.

  여인네들의 따스한 배웅을 받으며 이제는 영원불멸한 우리의 성웅 이 충무공을 뵈러 갈 시간입니다.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노량 해전 중 순국하신 충무공의 유해가 맨 처음 닿은 곳인 이락사(李落祠),

  그곳이 첫 번째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 숨을 무겁게 들이마시고 가슴속 깊이 묵념을 올립니다.


 

이락사 입구에 님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방급(戰方急) 신물언아사(愼勿言我死)'.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너무나 유명해서 너무나 익숙했던 그리하여 그 소중함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렸던 충무공의 忠義를

  눈을 감고 찬찬히 되새겨 봅니다.
  이 땅에서 이분이 나고 지셨다는 것이 그저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이락사를 돌아 나가니 편백 나무와 굴참 나무, 상수리 나무 등으로 가득 찬 고즈넉한 숲길이 나타납니다.

노량 해전의 마지막 격전지 관음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첨망대로 향하는 길입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충무공 영상 관람을 포기하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저 혼자 올랐던 길이라 살짝 찔리긴 합니다. ^^)



  가는 내내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땅만 보고 가지 말고 가끔은 하늘도 올려다봐. 앞만 본다고 해서 더 잘 보이는 건 아니잖아.

  옆도 보고 뒤도 봐야 훨씬 잘 볼 수 있다고.'

  상냥한 나무들이 시키는 대로 하늘도 올려다보고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갈지자로 걷다 보니

  나무 틈 사이로 관음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이 땅의 가장 큰 별이 진 곳, 관음포 앞바다입니다.

 

첨망대의 계단을 하나씩 숨죽이고 오르고 나서야 감고 있던 눈을 뜹니다.

400여 년 전 이 평화로운 바다 위에서 세계 4대 해전으로도 손꼽히는 노량 해전이 일어났다니 당최 믿을 수가 없습니다.

평화는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렇듯 150척으로 왜선 400척을 침몰시키고 관음포로 도망친 왜장을 추격해 나머지 50척을 침몰시키고 나서야

  장엄한 죽음을 받아들이셨던 충무공이셨기에, 적군에게까지 칭송의 대상이 되는 것이겠지요.


  왜장 와키자카의 말입니다.
  "내가 가장 두려운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바로 이순신이다."


 

첨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상수리 나무. 굳세고 충직함이 이 충무공을 꼭 빼닮았습니다.



  반의반의 반만이라도 충무공의 충직함을 배워야 할 터인데
  大義는커녕 작은 것에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참말로 큰일이구나, 싶어집니다.
  반성과 후회에 등이 떠밀려 아래로 내려오니 남해 대교가 코앞에 보이는 노량에 들어섭니다.

 

 

충무공의 업적과 얼을 계승하기 위해 실물 크기로 복원해 놓은 거북선.
생각보다 크기가 작아서 좀 놀랐습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배로 왜적을 물리치셨다 하니 탄복하고 또 할 수밖에요.



  그리고 마침내 이 여행의 종착지에 다다릅니다. 남해 대교입니다.

  남해 대교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라고도 하는군요.

  여느 어촌 마을처럼 곳곳에 횟집 간판도 눈에 띄고

  길 한쪽에는 남해의 자랑인 멸치와 굴 껍데기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습니다.


 

 

 

  자, 이제 저 아름다운 남해 대교를 건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남해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제 마음에 닿아, 또 하나의 길이 생겼습니다.
  그 길이 제 삶에서 어떤 길로 남을지는 순전히 저 자신의 몫이겠지요.
  결국 이번 여행도 모든 여행이 그러했듯, 남해를 돌아본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돌아본 것인가 봅니다.


  살다 보면 가져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참 많습니다.
  희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여유와 욕심, 배려와 이기심, 끈기와 체념, 의지와 나태...
  절대로 전자와 후자를 혼동해서는 안 되겠지요.

  버릴 것을 가지고 가질 것을 버린다면,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립니다.

소추섬을 마주 보는 저 벤치에 앉아 제가 좋아하는 김광균 님의 시 한 자락을 읊노라면,

빠르게 지나치는 시간까지도 어쩌면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려수도가 안개 속을 달리어간다.


  갈매기 날개 위에

  떠올랐다 잠기어가는 섬 섬들

  그곳에는 누가 사는지

  한 줄기 밥짓는 연기

  어두워오는 파도 위에 서리어 있다.


  三仙島 가까이

  낡은 배는 기웃거리고

  삼천포 향하여 기적을 울리고 가나

  밀려나가고 또 되돌아오는

  바닷물의 나즉한 통곡 소리뿐


  이 沙望 파도 끝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물소리와 함께 저무는 인생 위에

  내 조그만 思念의 배는 돛대를 내리고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는 것일까


  해도 저물고 섬도 저물고

  한려수도는 끝이 없고나

  껴안고 싶은 섬들 하나 둘 사라진 뒤에

  떼지어 오는 바람 배 난간을 때리고

  나는 어두운 램프燈 아래 기대어 앉아

  지금은 돌아오지 않는

  모-든 것에 눈을 감는다.


  - 김광균 님의 <한려수도> 전문


 

무엇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말간 얼굴로 욕심까지 유배시키는 저 아름다운 섬 남해 끝에는.

지금은 돌아오지 않는 모든 것에 눈을 감기 전에 말입니다.



  절망을 이겨내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사람과 삶을 처음과 같이 끝까지 믿어주는 것 또한 절대로 쉽지 않겠지요.


  그럴수록 무엇에든 온 마음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언젠가는 닿으리란 신념으로요.
  그래야 뼈저린 후회가 없을 테니까요.
  가진 것 없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하루하루 애쓰며 살아가는 것.
  최소한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겠지요.


  머무를 때가 있으면 떠나야 할 때가 있는 법.
  남해를 뒤로하고 다시 길 위에 서서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리려고 한 것도 욕심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행복해질 그날을 소망하며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묵묵히 서 있는 표지판을 따라 저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
울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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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려해상국립공원 / 해양국립공원

주소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634번지
전화
055-860-5800
설명
전남 여수시에서 한려수도 수역과 남해도·거제도 등 남부 해안 일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