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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의 곳간] 리뷰

[책/소설] 네가 풀이었을 때 - 한수산

 

아름다운 기억에는 버튼이 달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콕~ 재생 버튼만 누르면 스르르 화면이 돌아가고,

이미 어른이 돼 버린 제가 기억 속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이로 변해 가는.  

그 시간 안에서는, 저는 언제나 철부지이며 언제나 떼쟁이이며 언제나 용서받으며 언제나 까르르 웃습니다.

소중한 것들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습니다.

 

오래 전 책이지만 여전히 투명하게 빛이 나고 있는 책 한 권, 여기 풀어놓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쯤은 맑아지기를 소망하면서.


 

 

 

 

 

  - 韓水山의 <네가 풀이었을 때>(1981年 再版本, 심설당) -

 

 


 

  있잖아요, 그걸 처음 알았을 때 난 얼마나 신기해 했는지 몰라요. 너무너무 재미있고, 아, 어른들이 사는 세상은 저런 것이로구나 놀랐지 뭐예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초인종이 울리면 엄마는 대문으로 나가시곤 했지요. 그것뿐인 줄 알았으니까요. 
  아빠가 회사에 나가시고 할머니도 구멍가게 옆 골목에 사시는 3대네 집으로 가시고(3대는 뭐냐 하면요, 그 집 꼬마가 3대독자래요. 그래서 우리 집에선 그냥 3대네 집이라고 불러요), 그러고 나면 집 안에는 수돗물 흐르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게 돼요.

  괘종시계가 땅땅 하며 열한 시를 치는 시간이에요

  이상하죠, 아홉 시나 저녁 일곱 시나 그럴 때와는 달리 아침 열한 시에는 아주 땅땅 하며 괘종시계가 울리는 건 말예요.
  수돗물 흐르는 소리, 열한 시를 치는 시계 소리... 그 시간이면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이에요, 매일은 아니죠. 
  엄마가 대문을 조금 열면 그 사람은 하얀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어요. 그럼 엄마는 손의 물기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가서는 돈을 가지고 나와요.
  남자는 돈을 받고 그리고 엄마는 그 남자가 준 종이를 들고 들어와요.

  그건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예요. 어른들의 소꿉장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저건 뭘까, 왜 엄마는 하얀 종이를 내밀면 돈을 주는 걸까. 그런 놀이는 얼마나 재미있어요. 나는 마침내 결심했지 뭐예요. 저 놀이는 어떤 걸까 알아내기로.
  고모는 내가 모아 온 그 종이쪽지, 엄마에게 돈을 받고 주고 간 그 쪽지들을 읽어 주었어요.
  "응... 이건 수도요금이고 이건 신문대금이구나. 웬 신문을 두 개씩 본담."
  "있잖아 고모, 넣지 말래도 막 넣어. 그래서 그래."
  "또... 이건 전기요금이구나. 여름이라 냉장고를 돌려서 그랬나 많이 나왔는데."
  "많아, 진짜 냉장고 많이 틀었어. 아빠는 냉장고에 넣었던 맥주만 먹어."

  그때였어요. 나는 알아 버렸지 뭐예요. 전기 쓴 값, 신문 본 값, 또오... 목욕하고 세수하고 밥도 하느라 쓴 수돗물 값, 
그런 걸 하얀 종이에 적어서 가지고 오면 엄마는 돈을 주는 거로구나. 너무너무 재미있지 뭐예요.

  어른들도 참 우습지 뭐예요. 그걸 종이에 이쁘게 적어서 엄마한테 내밀 건 뭐예요. 그냥 얼마 얼마 돈 내십쇼 하면 될 건데도, 참. 
  나도 엄마에게 적어서 내밀 게 뭐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서 난 꿈을 다 꿨지 뭐예요. 
전기요금 받아가는 꿈을 말예요.
  생각했어요. 나는 엄마한테 무엇을 적어서 낼까. 

  전기니 수도니 신문이니, 참 텔레비전 보는 값도 있어요. 그런 거야 다 남들이 하니까 난 다른 걸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생각하다가 나는 이렇게 적기로 했어요. 그런데 사실은요, 돈을 얼마로 적을까가 제일 걱정이었지 뭐예요.

  - 아빠 담배 사온 거 500원. (정말이지 담배 한 번 사오는 데 5원이라고 쳐도 제가 백 번만 갔겠어요?)

  - 엄마 시장 갔다오게 집본 거 300원. (하여튼 이건 있죠. 담배 심부름이 500원이니까 한 300원은 받아야지 하고 생각한 거예요.)
  - 노래한 거(이거 때문에 진짜 고민했어요. 얼마로 적느냐 말예요. 내가 노래를 부른 건 말도 못하게 여러 번이거든요.) 500원짜리 열 장.
  (왜냐면요, 언젠가 아빠 친구가 집에 왔다가 내 노래를 듣고 500원을 준 적이 있어요. 난 참 이런 돈은 안 받는데 그 날은 할 수 없이
받았지만,

  한 번 노래하는 데 500원이면요, 진짜 내가 아빠한테 노래해 준 걸 다 따지면 말도 못하게 많은 돈이에요. 그렇지만 아빠니까 조금만 받아서 열 개예요.)
  - 일요일 날 코 잡아서 아빠 깨운 거 1000원.
  (아빠는 정말이지 일요일이면 코를 한 번 잡아서는 꿈적도 안 한다구요.
세 번도 더 잡아당기면 겨우 한다는 소리가 뭔지 알아요?
  아이구, 이 애물들 같으니라구, 그래요. 어떨 땐,
아이구 지겨워 이 웬수들아, 그럴 때도 있다구요, 씨이.)

  나는 엄마에게 내 하얀 종이를 내밀었어요.
  난 말이죠, 아빠 월급 탄 지도 벌써 오래니까 며칠 있다 오세요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어요. 엄마는 그러기도 하거든요.

  "신문값이니? 초순에 와, 그때 줄게." 하는 걸 저도 몇 번 들었으니까요. 
  괘종시계가 이상스레 땅땅 울리기 시작하고, 수돗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고 그리고 할머니도 3대네 집으로 간 시간에 나는 엄마에게 그 쪽지를 내밀었어요.
  나야 뭐 바쁜 건 아니니까  대문에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죠. 
그렇지만 엄마에게서 받을 건 받아야 하잖아요. 어른들은 다 그렇게 하니까요.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까. 언젠가 수도 계량기가 망가졌을 때처럼 막 화를 내지는 않을까도 걱정이었지요.
  나야 무슨 계랑기가 있나요. 
그렇다고 그때 그 남자처럼 구청 수도과에 가서 얘기하세요, 할 수도 없잖아요.
  또 전화요금이 많이 나왔을 때처럼,
"전화국엘 가봐야겠어요. 아무래요 이상해요." 하면서 전화국으로 가는 그런 일이나 나지 않을까도 조금 걱정이긴 했죠.

  엄마는 내 눈을 한 번 들여다보았어요. 그러곤 다시 종이쪽지를 봤어요.
  나는 뭐 바쁠 게 없는 건 사실이니까...
난 바쁘진 않아 하면서 저는 엄마 혼자 두고 방을 나왔어요.


  저녁이었어요.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어서, 그래서 엄마를 마주칠 때면, 난 바쁘진 않아, 사실 바쁠 건 없어 하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엄마가 날 부르지 않겠어요. 엄마는 돈 대신 하얀 종이쪽지 하나를 내게 주었어요.
  아닌데, 틀리는데, 어른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하여튼 저는 그 쪽지를 받았어요.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 다리 네가 딸인 거 500원. (네가 딸이어서 할머니가 얼마나 서운해 했는지 아니?)

  - 울보였던 거 300원. (네가 한 살 때 얼마나 울보였던지 엄마는 널 밤이면 꼭 업어서 재워야 했단다.)
  - 엄마가 아팠던 거(나도 이거 때문에 고민했단다) 500원짜리 열 장.
  (너를 낳으러 병원에 갈 때 엄마는 막 무섭기까지 했단다.
그리곤 얼마나 아팠던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너를 낳느라고 힘겨웠던지, 밖에서 기다리던 아빠까지 담배를 두 곽 반을 피웠거든. 이건 아마 이 다음에 너도 알게 될 거야.)

  - 새 신, 새 옷을 사야 했던 거 1000원.

  (네가 너무 빨리 자라서, 첫 아이인지라 잘 몰랐던 엄마는 옷이며 신발을 너무 많이 샀다가 입히지도 못하고 새것들을 사야 했거든.)

  참 나도 바보지 뭐예요. 막 울어 버렸거든요. 내 쪽지와 엄마의 쪽지는 너무 딱 맞아서 우린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지 뭐예요.

  내가 울고 있는데도 엄마는 자꾸만 웃고 있었어요. 참, 어른들은 왜 자기들끼리만 놀이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땅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구 말예요. 거꾸로 땅에서 태어나 할머니였다가 엄마였다가 점점 더 어려져서 나중에는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렇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생각했어요.
  엄마는 자꾸만 웃고 있었어요. 그 웃음을 보다가 나는 안 거예요. 아, 그렇구나. 엄마는 내게 내민 하얀 쪽지에 제일 큰 것은 적지 않았던 거예요.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거, 그거 말예요.
그걸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어요.

  나는 엄마를, 팔을 돌려 안으며 엄마의 배에 얼굴을 묻었어요. 엄마와 아빠가 우리를 하나의 씨앗으로 떨어뜨린 곳...

  그리고 우리에게 비와 햇빛과 흙이었던 곳, 나는 엄마의 배에 얼굴을 묻고 감사했어요.
  이 세상에 나를 보내준 그 넘치는 기쁨을 감사했어요. 그때 내가 웃고 있던 것을 엄마는 몰랐겠지요.

 

  - 본문 중에서.

 


네가 풀이었을때

저자
한수산 지음
출판사
심설당 | 1981-02-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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