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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의 곳간] 리뷰

[책/소설] 해빙기의 아침 - 한수산

1985年10月5日 초판본 / 중앙일보사 / 한수산 

 

 

세월에는 커튼 콜이 없다. 겹겹이 망각의 휘장이 내려질 뿐이다.
그 一回性.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서일까, 지나간 시간에는 너그러워지는 사람의 마음.
그래서 가슴 깊이 자국을 남기고 흘러가버린 아픔이라 하더라도, 지난 겨울의 외투를 벗듯 잊어버린다.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는, 머나먼 곳, 이제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갔지만 한때는 살을 파고드는 유리쪽처럼

순간 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던 나날들을 세월은 그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품고 잠재우는 것이다.

밝을수록 그림자는 선명한 법이다.

사람들은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구나.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기에도 힘겨워하면서, 끝내 남을 쓰다듬지도 못하는 한 개의 손.
그 손을 나뭇가지처럼 들고 살아가는...
결국 인간은 자기 환경만을 고집하는 不動의 식물이었던가.

비 내리는 날은 갇혀서 사랑하고, 눈 내리는 날은 헤매며 사랑하겠읍니다. 그러노라면 여름도 가고 가을도 가겠지요.

차곡차곡 개어놓은 세월이 모이면 우리들도 이루어 놓은 것들이 있으리라 저는 믿고 있읍니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돌아오다가 앉아 있는 사람들의 굳은 얼굴을 보면서도 외로움을 느껴야 하는 이 버릇.

난 뭐가 좀 쓸쓸해야만 사는 것 같은 그런 여잔가.

현실은 눈을 부릅뜨고 지나가는데 자기는 그 현실의 뒤켠에 남아서 시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슬픔보다 미움을 일게 한다.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러나 끝내 엄연하기만 한 삶의 질서를 나는 언제까지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하루하루의 생활은 대결이어야 하며, 자기 자신과의 대결에서라도 이기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이 목숨의 숨은 논리라면...

나는 왜 그렇게 살 수가 없는가.
지면서도 양보한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한 걸음 남들보다 뒤로 물러서서야 겨우 마음의 평화를 얻는가.
절망을 껴안고서야 겨우 앞으로 나갈 힘이 생기는가.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어서야 겨우 하나쯤 갖고 싶어하는가.

밤은 팔 없는 손이었다. 어디서부터 와서 자기를 안았는지 지하는 모른다.
다만 그녀는 들었다, 어둠이 속삭이는 소리를.
보렴. 이것이 내 얼굴이다. 사랑의 얼굴이다. 아무 것도 없는 빈 얼굴.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더냐.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이 허무의 얼굴을 보리라. 많은 환희를 약속하면서도 그것은 많은 고통 뒤에야 할 수 있으니

보렴, 이것이 밤의 길이니라. 사랑의 길이니라.
여인아, 너는 언제까지나 빈 얼굴을 껴안으려니, 너는 언제나 눈물과 환희를 함께 하리니, 그것이 사랑의 길이니라.

보렴. 사랑의 자리 그 어디에 약속이 무너지지 않은 자리가 있었느냐.

새벽빛 아래 이마를 비비며 울 때, 그 찬 아침 이슬이 네게 覺醒이었으며,

불을 찾아 헤매는 밤의 벌레들처럼 깊이도 거리도 없이 떠다닐 때, 그 한밤이 네게 희열의 시간이 아니었더냐.
여인아, 아무 것도 돌아보지 말라. 밤은 또 오고 새벽은 또 온다. 하얀 손들이 떠다니는 어둠.

사람은 바늘 없는 시계판이니 네가 비로소 이별할 때, 네가 어제로 하여 울지 않을 때, 깨닫고 깨닫고 깨닫거라.

 

- 한수산의 <해빙기의 아침> 중에서.

 

 

 

` ` ` ` ` `

세월로 바랜 책갈피 안에서 저리도 예쁘게 피어 있는 장미 한송이.
누구냐, 누구더냐, 누가 준 꽃이더냐. 앗! 기억 났다. 이런이런...

韓水山이여, 한때는 그대가 내 청춘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오.

이제는 그대 말처럼 곁을 지나간 '말탄 자'가 됐지만 말이오.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대를 꺼내드니 맘이 짠해지오.

놀랍구나,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흐른 것이냐.

보이느뇨, <정가 1,800원>! 
맞춤법이 달라지고 책값이 달라지고 흠, 그렇게 늙었구나 늙었어.

 

 

 


해빙기의 아침(상)

저자
한수산 지음
출판사
중앙M&B | 1992-04-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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