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은 죽는 방법으로 정해진다.
죽음은 사는 방법으로 정해진다.
삶은 불합리한 힘을 상대로 끝없이 싸웠느냐로 정해진다."
"내키는 대로 살고 싶어서, 살아 있다는 증거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싶어서, 나는 도망쳤다.
사치를 다한, 무엇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자유를 좇아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나중에 가서 울상을 짓지 마라'고 충고하는 소리로는 나를 붙잡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나를 추적하는 세월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달아나는 것이 속박을 푸는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경제적으로야 어쨌거나 기분상으로는 꽤 화려한 도망이었다.
국외의 무법지대로 내빼려는 범죄자와는 달리, 아무리 도망쳐도 달아날 길이 끊기는 법도 없고, 또한 달아날 곳을 잃은 적도 없었다."
"그들과 나의 본질적인 차이. 그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호해지고 있었다.
몸을 망가뜨린 것도, 인간 불신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나 스스로는 그럭저럭 모양을 갖추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어느새 미약한 존재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3년, 5년이라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내 청춘이 변화했다.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것이 급속도록 쇠퇴되어 갔다.
그런 식의 자유에는 이미 식상한 기분이었다. 편안한 삶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고독에도 불감증이 되어버렸고, 따라서 홀로 사는 자의 홀가분한 무언가를 느끼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냥 이 상태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스스로의 삶에 주도권을 쥐는 것마저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생명이 있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결수의 낙인이 찍혀 버렸다. 사형판결이 내려지고 말았다.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으리.
나는 내가 나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도 모른 채, 나를 업신여기고 있다.
케케묵은 교훈 따위를 지키면서, 심하게 곡해당하는 것을 남몰래 두려워하면서,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임기웅변으로 궁리하면서, 이도저도 아니라 꽁무니를 빼려 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내포하게 될 능력의 10분의 1도 발휘하지 않고 내 인생은 어이없이 막을 내리고 말 것임에 분명했다.
불충분한 혀짤배기 언어의 바다에서 익사하고 말게 되리라."
- 마루야마 겐지의 <도망치는 자의 노래> 중에서.
가치관이 전혀 다른 이의 글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오히려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는다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우선 근래의 젊은 작가들의 신변잡화적인 끄적거림이 아니라,
한 가지 주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짐 없이 일정한 긴박감을 유지하며 써내려가고 있는,
이 작가의 탄탄한 문장력에 주목하게 된다.
거침없이 묘사해 내는 자연의 풍광이나 인물의 행태, 세밀하면서도 적확한 심리 묘사 등에는,
그 현란한 솜씨에 주눅이 들기까지 한다.
다만 크고 작은 이야기의 결말이 너무 예상하기 쉬운 것이어서-일부러 복선을 깔아놓은 것들이 너무 딱딱 아귀가 들어맞아-그것이 좀 아쉬웠다.
꽤 분량이 많았는데도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다음 장을 넘기게 하는 작가의 기백이 매력적이다.
소장할 가치가 있겠다. 몇 권 더 살펴본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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