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年3月15日 초판6쇄본/ 도서출판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오래 전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던 책 한 권.
밤새 낄낄거리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저 피아노 건반에 붙은 코딱지 묘사 장면은 압권이다.
두 말 필요없다. 불후의 명작이다.
어찌 이리 명쾌할꼬! 상페의 그림도 최고!
. . . . . .
내가 왜 두 번째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아마도 곡 전체를 올림 바 음으로만 치고 싶을 정도로 음표마다 올림 바 음을 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강요하면서 올림 바를 치지 않을 것을 무진장 노력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직 올림 바를 치면 안돼, 아직 아냐.. 아직...
그러다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부분에서 그만 올림 바 대신 바 음을 눌러버렸던 것이다.
선생님은 금방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쇳소리를 내며 야단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올림 바라고 했잖아, 이 바보멍청아! 올림 바! 올림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이 바보야? 이거잖아!" 땡--땡--. "이게..."
그렇게 말하면서 선생님은 수십 년 동안 피아노를 가르치느라고 십 전짜리 동전만하게 뭉툭해진 둘째손가락으로
사 음의 아래에 있던 검은색 건반을 눌러댔다.
"... 이게 올림 바야...!" 땡-- 땡--. "... 이게..." 그러다가 선생님이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를 하고 나서 내가 위에 묘사한 바 있는 둘째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치고는 연속 쇳소리를 내면서 두세 번 더 건반을 눌렀다.
"이게 올림 바야, 이게 올림 바라구... !" 그러고는 선생님이 옷소매 끝에서 손수건을 꺼내들고 코를 풀었다.
올림 바 건반을 쳐다보던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 건반의 앞쪽 끄트머리에 미스 풍켈 선생님이 재채기를 할 때 코털에 붙었다가,
그곳을 훔쳐낼 때 둘째손가락으로 옮겨붙었다가, 둘째손가락에서 올림 바 음 건반으로 옮겨붙어 크기가 손톱만하고,
굵기는 거의 연필굵기만하며, 벌레처럼 휘어진 데다가 녹황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기조차 하는 끈적끈적한 코딱지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선생님이 어금니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하나-둘-셋-넷..." 우리는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후의 30초는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고역스러움 시간이었다.
나는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다는 것과, 두려움으로 인해 배어나오는 땀방울이 목 언저리에 맺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빳빳하게 섰고, 귀는 한번은 차가웠다가 한번은 뜨거웠다가 하더니
결국에 가서는 뭔가로 막혀서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안톤 디아벨리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악보도 보지 않은 채 두 번의 반복으로 저절로 굴러가는 손가락을 따라 기계적으로 쳐나갔다.
오로지 내 시선은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의 코딱지가 붙어 있는 사 음 밑의 가는 검은 건반에만 고정되었다...
이제 일곱 마디만 지나면, 아직 여섯 마디만... 물컹한 코딱지를 누르지 않고는 그 건반을 도저히 누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제 다섯 마디, 이제 네 마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올림 바 음 대신에 그냥 바 음을 치는 짓을 세 번째로 한다면, 그렇다면... 이제 겨우 세 마디--
오, 하느님 기적을 이루소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소서! 무슨 행동이라도 보이소서!
땅을 쩍 갈라지게 만드소서! 올림 바 음을 칠 필요가 없게 시간을 거꾸로 돌려주소서... 이제 두 마디, 이제 한 마디...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을 지켰고 아무 행동도 보이지 않았으며 마지막 끔찍스러운 마디의 순간은 도래하였다.
그 마디는--아직도 내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라 음에서부터 올림 바 음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의 8분의 1 박자를 치다가 그 위에 있는 사 음의 건반을 4분의 1 박자로 치고 끝맺는 것이었다...
마치 황천길을 가듯이 내 손가락이 8분의 1 음표 계단을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라-다- 나-가-사... "올림 바!" 옆자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이 멀쩡한 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죽는 것조차 무섭지 않다는 듯이 바 음을 쳤다.
내가 가까스로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빼내자마자 피아노 뚜껑이 꽝 소리를 내며 닫혔고,
내 옆자리에 있던 미스 풍켈 선생님은 악마처럼 펄펄 날뛰었다.
"너 일부러 그랬지!" 꽥하며 지르던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 소리는 귀머거리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내 귀 속을 파고들었다.
"고의로 그렇게 한 거야, 이 괘씸한 놈! 건방진 놈, 못된 놈! 벼르장머리 없는 쓰레기 같은 놈..."
그렇게 말한 다음 선생님은 발을 쾅쾅 굴러대면서 방 한가운데 있던 식탁으로 가더니 말을 두 마디 뱉을 때마다 주먹으로 식탁을 쾅쾅 내리쳤다.
"네 녀석이 암만 그래도 네까짓 녀석이 나를 갖고 놀게는 안 해, 알았어? 내가 이렇게 화만 내고 말리라고는 꿈도 꾸지 말아라!
네 엄마한테 전화할 거야. 네 아빠한테도 전화할 거야. 네 녀석이 일주일은 제대로 앉지도 못할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패 주라고 할 거야!
앞으로 3주일 동안은 집 밖으로도 내보내지 말고, 하루에 세 시간씩 앉아서 사 장조를 연습시키라고 하고,
거기에다 라 장조, 가 장조, 올림 바, 올림 다, 올림 사도 네가 그런 것들을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시키라고 할 거야!
내 맛 좀 보라구, 이 말성꾸리기 같은 녀석 같으니라구! 너 같은 녀석은...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 내 손으로 직접... 그냥..."
그러다가 선생님은 너무 노여운 나머지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양팔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더니
금방 터져버리기라도 할 듯이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앞에 놓인 과일접시에 있던 사과를 하나 집어가지고,
그것을 어찌나 세게 던져버렸는지 그것이 당신 어머니의 거북이 머리 같은 머리를 약간 위쪽으로 벗어나며
벽시계의 왼쪽 벽에 갈색 흠집을 내고 터져버렸다.
그러자마자 누군가 작동 단추라도 누른 것처럼 칭칭 감겨져 있던 곳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 같더니
감고 있던 옷의 주름 사이로 노인의 손이 나와 자동적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과자 있는 쪽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것을 미스 풍켈 선생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나만 봤다.
대신에 선생님은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손을 쭉 뻗으며 나가라는 손짓을 하면서 쇳소리를 냈다.
"네 물건 싸가지고 꺼져버려!" 내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오자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내 등뒤에서 닫혔다.
나는 온몸으로 떨었다. 무릎이 너무나 떨려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고사하고 거의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짐을 싣는 곳에 얹어놓은 악보책을 잡고 자전거를 옆으로 밀면서 갔다.
그것을 밀고 가는 동안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나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들고, 오한이 날 정도로 몹시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은 미스 풍켈 선생님의 난리법석이 아니었다.
매맞을 것과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감금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뭔가를 두려워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보다는 이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한 덩어리일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노에 찬 자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못된 개의 잘못은 또 다른 문제였다. 모든 것이 다 문제였다. 어떤 것에 대한 예외도 없이 모든 것이 다 그랬다.
우선 제일 먼저 내게 맞는 자전거를 사주지 않은 우리 어머니가 원망스러웠고,
어머니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아버지가 그랬으며,
선 자세로 자전거를 타야 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몰래 나를 비웃었던 누나와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들었던 하르트라웁 박사님 댁 개의 똥도 그랬고,
호숫가 길을 꽉 메워 나를 늦게 도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산보객들도 그랬다.
푸가 형식으로 나를 괴롭히고 모욕스럽게 만든 작곡가 헤쓸러도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올림 바 음 건반 위에 구역질 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미스 풍켈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딱 한 번 필요로 하였을 때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건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만 지켜보았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세상 사람들이 자비롭다고 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 잘 먹고 잘해 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는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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