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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길] 我

하수구에 빠졌다

 

 지난 가을 이야기...

 

하던 짓을 했다.

일 때문에 계속 미뤄왔던 약속을 잡고 오랜만에 지인과 만났다.

이른 저녁을 맛나게 먹고 다시 일 때문에 서둘러 헤어졌다.

초저녁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코끝에 달라붙었다. 달무리진 반달도 한몫 거들었다.  

일이고 뭐고 잠시 접어 두고, 차로 1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걷기엔 사실 좀 무리였다.

야트막한 산을 낀 2차선 도로였고 어두웠고 인도도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안양에서 안산까지 걸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6시간 정도 걸렸었다. 그러므로 '이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왼손에는 선물로 받은 샘터 책과 교보문고 달력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오른손에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든 채 타박타박 걸어 나갔다.

그동안 잊고 있던 가을날의 여유와 평온함이 제법 그럴싸하게 다가왔다.

 

시작은 좋았다.

6시 35분. 출발 시간까지 체크하며 집까지 얼마나 걸릴까 가늠해 보았다.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사이사이 몇 통의 전화를 받았고, 한 통은 길게 나머지는 짧게 통화했다.

추위를 엄청 타는데도 든든히 껴입은 옷 때문에 춥지 않았다.

그 동안 숨쉬기 운동만 했는데도 걷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삼분의 일쯤 걸었을까.

의기양양하게 걸어온 길을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몇몇 지인들에게,

이 시대의 가장 빠른 편지인 문자 메시지를 쓰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걸을 때는 물론이요 평소에도 휴대폰이랑은 잘 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안 하던 짓이었다.

 

전송 버튼을 막 누르려는 찰나였다.

정말로 별이 보였다.

밤하늘의 별보다 훨씬 더 반짝이는 별이었다.

손 쓸 새도 없이 발이 훅 하고 밑으로 꺼져 들어가더니, 어마어마한 통증이 몰려왔다.

불과 1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팔만 간신히 땅 위에 걸쳐진 상태였다.

무방비 상태로 부지불식간에 하수구에게 당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수구를 덮어놓은 돌덩이 하나가 비어 있는 걸 미처 발견 못하고,

그 틈새로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터였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흩어져 있는 쇼핑백과 커피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른쪽 정강이에서는 피가 났고, 왼쪽 발은 땅에 디딜 때마다 욱신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하면서 절뚝절뚝 폐점 상태인 편의점 계단으로 가 앉았다.

 

순간, 온갖 것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멀쩡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돌덩이에도 화가 났고,

도로정비라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도로정비과에도 화가 났고,

무슨 놈의 낭만을 느끼겠다고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로 한 것에도 화가 났고,

문자를 보내는 데 정신이 팔려 빈틈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도 화가 났고,

나로 하여금 문자를 보내게 해서 이 사단이 나게 한 애먼 사람들에게도 화가 났고,

하필이면 절반도 채 되지 않은 거리에서 하수구에 빠지게 한 하늘에게도 화가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전 안 하던 짓을 한꺼번에 몰아서 한 나 자신에게 제일로 화가 났다.

갈 길은 멀고 몸은 다쳤고 일은 밀려 버렸다. 젠장! 젠장! 젠장!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점점 밤이 깊어가고 있었고, 버스도 택시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오지 않는 길이었다.

그러니 한 발 한 발 내 발로 걸어서 가는 수밖에. 이번에는 오기란 놈이 한몫할 차례였다.

 

딱 9시 정각에 집에 도착했다.

두 시간 반이 걸린 셈이었다. 놀란 식구들이 뛰어나왔다.

왼쪽 발이 퉁퉁 부어 신발을 벗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통증은 오늘보다 내일 더 심해질 것이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내일이 되면 언제 다쳤나는 듯 말짱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 지금의 통증을 까먹게 될 즈음엔, 안 하던 짓을 또 하게 될 것이었고,

그러다가 또... (아이고~ 아니지, 이건 아니지. ^^)

어쨌거나 나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상처투성이가 되긴 했어도 이만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리석게도 무슨 일이 생기기 전까진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해 탈이었지만,

그 덕분에 심오한 교훈을 얻었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도 아니었다.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하던 대로 살자."

이것이 바로 오늘의 뼈아픈(!) 교훈이었다.

현장검증사진(도로정비과, 고소하고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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