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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밑에서 눈을 감다 그리움이 떠도는 거리. 저만치 푸른 빛의 사그라짐을 건너다본다. 이윽고 나타난 붉은 빛 아래 외로움이 질주를 시작하고, 띄엄띄엄 꼬리를 무는 허망함에 발길을 멈춘다. 저려오는 발끝 엄지발가락, 휘어진 발톱의 비명을 들으며 내달린 거리. 턱하니 버티고 서서 시비를 걸어온다. 네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닐지니. 명멸하는 붉은 빛 사이로 샛노란 서러움 북받치고. 어쩌다 여기 서 있는가, 스쳐가는 인연들이 저만큼 앞서갈 때 꽁무니조차 따라붙지 못하고. 앞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는 무심한 생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깜·박·깜·박 발끝에 매달린 자존심이 재촉을 하면, 성글게 떠돌던 그리움에 등이 밀린다. 또 다른 그리움이 대기하고 있는 새 건널목으로. 더보기
[꽃집 일기 1] 꽃집의 아가씨? 로즈마리와 함께 대표적인 허브 중 하나인 라벤더(Lavandula angustifolia). 꿀풀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 손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상큼한 향기가 난다. 연보랏빛 꽃에 어느새 벌이 날아들었다. [prologue] 봄빛이 천지를 물들이기 시작하던 4월의 첫째 주 토요일, 언니들에게 전화가 왔다. 올해는 식구들끼리 모여 해마다 해오던 주말농장을 하지 않게 되어, 각자 집의 마당이며 베란다에 심을 모종과 꽃을 사기 위해 꽃집에 들렀단다. 엄마가 좋아하는 토마토랑 상추 등의 모종도 따로 사놓았다면서, 조만간 집에 와 엄마랑 같이 심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 "꽃집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주인아주머니께서 아르바이트 할 사람 좀 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 더보기
[책/詩] 구겨진 종이는 슬프다 - 이수익 평면의 탄탄했던 육체에는 금이 가고 그를 움켜쥐었던 손의 분노와 실의와 공허만이 지금, 쓸쓸한 陰影으로 남아 있다 --구겨진 종이는 슬프다 구겨진 그만큼 더욱 슬프다 울음을 去勢당한 목줄기들의 소리없는 출혈...... - 李秀翼의 詩 전문 거의 이십 년 전 이수익의 시집을 읽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시가, 이제야 마음에 닿는다. 여전히 좋은 시도 있고, 그때는 왜 이 시를 좋아했을까 하는 시도 있고, 새롭게 좋아지는 시도 있다. 근 몇 년 동안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던 책들을 꺼냈다. 생각 몇 개, 글 몇 줄. 지겹고 지겹지만 결국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참으로 싱거운 한낮이다. 단순한 기쁨(고려원시인선 1) 저자 이수익 지음 출판사 고려원 | 1987-03-01 출간 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