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수필] 인생은 지나간다 - 구효서 우리 곁에 널려 있는, 많은 사소한 사물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중층적 정보들로 가득 차 있을 뿐더러, 생명과 존재가 연출하는 '삶'의 충실한 반영자며 증거물이다. 사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숨결은 결코 옛것이거나 흔적으로서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내 삶을 여전히 충동하고 위로하며 고양하는 실재다. 모든 게 귀하고, 소중할 뿐이다.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다. 기억은 색깔과 소리와 냄새도 없이 깊고 어두운 두뇌 한 귀퉁이에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을 밝은 빛 아래로 꺼내어 놓아야만 비로소 색깔과 소리와 냄새가 서서히 재생되는데, 이처럼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를 추억이라 한다." - 구효서의 中 추억의 사물들(물동이, 양변기, .. 더보기
원칙과 의지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신호등 아래 섰다. 잠시 갈등을 한다. 혼자라는 것, 차량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늦은 시간이라는 것. 이럴 땐 오히려 녹색 불이 켜지길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다시 멈춰섰다. 왠지 치사한 기분이 들어서다. 누가 지켜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며 길을 건너려 하는 자신이. 신호가 바뀌는 그 짧은 순간에도 무언가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 아예 처음부터 생각 없이 성큼성큼 건너갔으면 좋았을 것을. 왜 매번 그 타이밍을 놓치는 건지 모르겠다. 문득 원칙과 의지의 부재(不在)란 생각이 든다. 먼저 원칙(原則)을 정했더라면 이런 갈등은 하지 않아도 됐을 터. "어떤 상황이든 신호등은 반드시 지킨다." 혹은, "상황에 따라 .. 더보기
얘들아, 올해도 수고 많았다! 개나리, 목련, 벚꽃, 라일락, 철쭉, 민들레에게 그러니까 말이지, 너희들을 만난 게 언제냐 하면, 띵까띵까 서너 달은 족히 놀았을 겨울이란 놈이 마지막 심술을 부릴 때였어. 여린 봄 햇살이 맥을 못 출 때였지. 꽁꽁 언 마음이 채 녹지 않은 그때, 수줍게 고개 내민 너희들과 눈이 딱 마주친 거야. 얼마나 반갑고, 기쁘고, 마음이 놓이던지. 한편으론 너희들이 뚫고 지나왔을 세찬 바람과 모진 추위와 잔인한 허기를 생각하니, 얼마나 코끝이 찡하던지. 게다가 겨우내 배부르고 등 따습게 놀고먹었던 나 자신과 비교하자니, 얼마나 또 부끄럽던지. 기억나니? 너희 앞에서, 모처럼 곤하게 든 잠을 깨우는 건 아닌가 싶어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조심조심 뒷걸음치던 사람 있잖아? 헤헤, 그게 바로 나란다. 그리고 말이지, .. 더보기